반응형
《漢書》 권72 공우貢禹 傳에 이르기를 “산을 채굴해서 구리와 철을 캐는데 한 해에 이에 종사하는 이가 10만 명 이상이다[攻山取銅鐵, 一歲十萬人以]”라고 했다.
이런 언급이 조금은 과장이 있겠지만, 공우가 활동하던 저 시대에 광산업으로 거부를 이룩하는 권력 혹은 재벌이 있었음을 증언하거니와,
하긴 그보다 그 직전 무제武帝시대야말로 광산업자들 전성시대였으니, 흉노와의 오랜 전면전에 막대한 전쟁물자가 소요되니, 전쟁은 군비산업을 진흥하며, 그에 따른 신흥재벌성장을 촉진한다.
그런 여진이 공우 시대까지 계속하고 있었음을 본다.
공우貢禹(?~ BC 44)는 전한 중기 때 관료로 字를 소옹少翁이라 하며 낭야군琅琊郡 출신이다. 그의 출생을 기원전 124년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확실한지는 모르겠다.
선제宣帝 시절 간대부諫大夫가 되었고 누차 원제元帝한테 상서하면서 조정이 부패하고 권력자들이 사치하며 반면 군현 사람들은 궁핍하니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재능있는 사람들을 발탁하며 간신을 척결하며 절검을 숭상하고 요역을 탕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원初元 5년 6월에 진만년陳萬年을 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지만 그해 12월 거세去世하니, 설광덕薛廣德이 그 자리를 이었다.
POSCO만한 재벌이 중국 땅에는 이미 2천년 전에 즐비했다.
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은옥金銀玉, 장신구에서 해방해야! (0) | 2021.01.05 |
---|---|
심심해 죽을 지경인 능참봉 (0) | 2021.01.04 |
아들이 아버지 이름을 돌림하는 남조南詔 (0) | 2021.01.03 |
태산봉선泰山封禪, 그 예행豫行으로서의 취리산 회맹就利山會盟 (0) | 2021.01.01 |
낙랑군 위치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0) | 2020.12.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