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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구리, 제련도 하지 못하고 채굴도 못한 조선왕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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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동


서영보徐榮輔,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4 금·은·동·연金銀銅鉛 중 구리[銅]에 대한 기술 전문이다.


동銅

우리 나라에서 또한 동이 산출되나 제련하는 방법을 몰라서 공사公私 수용需用에 순전히[全] 왜동倭銅을 사용하였다. 영종 신유년에 비로소 수안遂安·영월寧越의 동을 채취하고, 그 뒤에 또 보은報恩·안변安邊의 동을 채취하였으나, 제련한 것이 마침내 왜동만 못하여 쓰이지 못하였다. 정종 을사년에 호조에서 주전鑄錢할 때에 안변의 영풍동永豊銅을 섞어 써서 이 뒤부터는 주전하는 데에 잇달아 사용되었다.


[주-D001] 순전히[全] : ‘순전히[全]’가 어느 본에는 ‘專’으로 되어 있음.
[주-D002] 수안(遂安) : ‘수안(遂安)’이 어느 본에는 ‘水原’으로 되어 있음.
ⓒ 한국고전번역원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역) | 1971


我東。亦自產銅。而不知吹鍊之法。公私所需。全用倭銅。英宗辛酉。始採遂安,寧越銅。其後又採報恩,安邊銅。而其所吹鍊。終不如倭銅。不得行用。正宗乙巳。戶曹鑄錢時。參用安邊之永豐銅。自是以後連用於鑄錢。


ⓒ 한국고전번역원


***

상평통보. 구리가 있어야 동전을 만들지?


구리 광산도 태부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아예 제련 방법도 몰랐다는 말이다. 꼭 나지 않는다 해서 이런 말을 할 순 없지만, 광산에 관한 한 조선왕조는 거의 거지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구리가 없었는가? 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개발할 생각도 없었고, 그러니 제련하는 방법도 몰라서 개판일보 전이었다.

각 부문에 소용할 구리는 모조리 일본에서 수입해다 썼다.

조선 후기 영조 때 이르러 구리 광산을 개발하기는 했지만, 이문이 남지 않았다. 기술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국산은 이내 퇴출되고 도로묵이라, 다시 일본 수입산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시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혹했다.

한국이 화폐 경제 발달이 아주 늦은 이유 중 하나가 동 부족이다. 찍어낼 구리가 있어야 동전을 만들든 할 것 아닌가?

나아가 이는 한반도가 동시대 중국 대륙에 견주어 청동기 등장과 그 광범위한 활용이 훨씬 늦은 이유이기도 하다. 구리가 있어야 청동기로 제기祭器를 만들건, 무기를 만들건 할 것 아닌가?

나아가 이는 조선왕조 이전, 예컨대 신라시대 그 막대한 구리 수요를 어찌 충당했는지를 둘러싼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훗날 한반도를 향한 구리 최대 수출국인 일본열도에서는 아직 구리 광산이 개발되기 이전이었다.

신라시대에는 알려진 구리광산 플러스 동제련 기술이 이후 단절되었는가? 아니면 신라 역시 외부에서 구리를 수입했는가?

이런 걸 궁구해야 할 한국고고학이 씨잘데기 없는 토기에만 정신 팔리는 통에 정작 중요한 것들은 손도 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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