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사가정 서거정이 증언하는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 탑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 1.
반응형
촬영자가 이희용 이라 뜬다. 내가 찍어놓은 것이 많은데 지금 찾기가 귀찮다. 다리와 머리가 납짝 붙었으니, 몸통이 다 깨져나간 까닭이다.



원주(原州)의 흥법사비(興法寺碑)를 읽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지은 것인데, 당 태종(唐太宗)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讀原州興法寺碑 高麗太祖所製。集唐太宗所書字。]

서거정徐居正(1420~1488), 《사가시집四佳詩集》 제2권 시류詩類


당 태종의 글씨는 용이 꿈틀거린 듯하고 / 唐宗宸翰動龍螭
여 태조의 문장은 유부의 말과 흡사하네 / 麗祖奎章幼婦辭
오늘날엔 누가 그 탁본을 세상에 전해서 / 今日誰敎傳墨本
만지는 순간 귀밑털이 흰 걸 느끼게 할꼬 / 摩挲不覺鬢成絲


[주-D001] 유부(幼婦)의 말 :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조아비문(曹娥碑文)을 보고는 그 비석(碑石) 배면(背面)에다 은어(隱語)로 황견유부외손자구(黃絹幼婦外孫齍臼)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뒤에 양수(楊脩)가 이것을 해석하기를, “황견은 색사(色絲)이니 글자로는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니 글자로는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여자(女子)이니 글자로는 호(好) 자가 되고, 자구는 매운 맛을 받는 것이니 글자로는 사(辭) 자가 되므로,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뛰어난 문장(文章)을 의미한다.

[주-D002] 오늘날엔 …… 할꼬 : 황정견(黃庭堅)이 오계(浯溪)의 마애비(磨崖碑)에 제(題)한 시에, “평생에 반생 동안을 탁본만 보아오다가, 석각을 어루만지는 지금은 귀밑털이 희었네.〔平生半世看墨本 摩挲石刻鬢如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4


***

국립중앙박물관 뜰을 장식하는 진공대사 부도탑. 이게 왜 서울에 있단 말인가?


사가정四佳亭이 증언한 흥법사비란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 Stele of Buddhist Monk Jingong at Heungbeopsa Temple Site, Wonju 를 말하는 것이라, 현장에는 삼층석탑과 더불어 그의 탑비가 몸통은 박살나고 현장에서 다 사라지고, 그 받침돌인 귀부와 그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이수만 착 달라붙어 남았을 뿐이다.

그 주인공 진공대사 행적을 정리한 비신碑神은 언제인지 다 깨져 나갔다. 자연으로 깨진 것이 아니라 누가 일부러 깨뜨려 버린 것이다. 그 파편 중 일부가 그의 부도탑과 함께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말 나온 김에 부도탑이 왜 서울에 있단 말인가? 당장 현지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때마다 전가의 보물이 있어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리했다고 하며, 실제 이 탑비에 대해서도 이런 주장이 횡행한다. 왜? 가뜩이나 나쁜 일본놈은 더 나쁜 놈이 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24년(941) 진공대사 충담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이 탑비 주인공 진공대사는 신라 말 고려 초 승려로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왕건의 왕사王師가 되어 흥법사에 머물다가 태조 23년(940)에 입적했다. 그 비문은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었다. 물론 직접이라 하지만 신하가 대신 썼다!!! 글씨는 당대 최고 명필 중 한 명인 최광윤이 당 태종 이세민 글씨를 집자해서 썼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흥법사지 발굴현장



저 사가정 증언이 중요한 대목은 첫째, 사가정 당대에 비가 비교적 멀쩡하게 남아 있었고, 그것을 사가정이 직접 읽어보았다는 점이다.

사가정은 젊은 시절, 같은 원주 땅 법천사에서 고시 공부인지를 한 인연이 있고 그 무렵에 남긴 시가 몇 편 전하지만, 이 시를 보면 그가 읽었다는 탑비는 그 실물이 아니라 "傳墨本"이라 하는 점으로 보아 그 탑본임을 미루어 짐작한다.

덧붙여 저 사가정 시대에 이미 탁본이 유행했음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저명한 옛날 금석문을 깨뜨린 것은 왜적이 아니라 실은 그 탑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른바 민중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탁본해서 올리라는 통해 그 고통이 오죽이나 심했으면,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비석을 아주 박살냈겠는가?

밑도 끝도 없는 임란 왜적 타령은 그만했음 싶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