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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국가서훈을 둘러싼 격렬의 논쟁 약산 김원봉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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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넘어간 김원봉, 행정관료로 전락해 입지 상실"

송고시간 | 2019-12-08 09:44

김광운 국편 편사연구관, 북한 사료로 약산 행적 분석



대일 항의집회에 등장한 항일 상징으로서의 약산 김원봉



문제의 논문 전부를 소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섣불리 말하기 힘들다는 점이 미리 말해둔다. 다만 이 시점에서 왜 이런 논문이 제출되었는가 하는 데서는 내가 짚이는 데가 없지가 않다. 


내가 개인적으로도 꽤나 잘 아는 김광운 선생이 이번 논문을 투고했다는데, 그 요점을 우리 학술담당 박상현 기자가 잘 정리했다고 본다. 


이 논문을 김광운이 왜 쓰야 했는가는 저 기사 다음 구절에 명백하다. 


김 연구관은 연구 배경에 대해 "김원봉의 독립운동 활동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충분히 알려졌으며, 역사적 평가와 관련한 논란이 거의 없다"며 "그런데 해방 이후 정치활동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음에도 평가를 둘러싸고 '절대 부정'과 '무조건 긍정'이 부딪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1948년 월북 이후 김원봉은 이렇다 할 족적이 없다는 것이다. 비실비실하다가 끝났다는 것이다. 


김원봉 서훈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집회




김원봉은 북한이 인민정권의 독재 기능을 강화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해 나아간 1958년에 불어 닥친 세대교체 과정에서 권력을 잃었다고 김 연구관은 부연했다. 북한에서 확인되는 김원봉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1958년 6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 참가였다.


김 연구관은 조선노동당이 북한 사회 영역을 성공적으로 통합하면서 김원봉이 설 자리를 잃었다면서 "김원봉은 이미 만들어진 북조선 질서의 정당화에 복무하며 자신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잃었고, 결국 행정 관료로 영락해 1950년대 후반 북한의 변화된 현실에서 입지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이 일로 김광운과 별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다만, 그의 평소 성향 등을 고려해 짐작건대 이 논문이 겨냥하는 바는 결국 김원봉을 서훈하자는 것이라고 본다. 


김원봉이 월북 이후에 이렇다 할 북한 주체정권을 위해 복무한 전력이 없으므로, 서훈해도 된다 이거라고 본다. 


왜 이렇게 짐작할 수 있는가?


김광운도 말했듯이 월북 이전, 그러니깐 식민지시대 공간에서 김원봉의 활약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무장봉기 투쟁, 테러를 무기로 하는 격렬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으니, 그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서의 약산 김원봉



바로 이 지점에서 이를 착목한 사람들은 대체로 김원봉을 서훈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 이후 행적에 논란이 극심하다. 그는 자발로 북한으로 넘어갔고, 북한 정권에서 꽤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더구나 한국전쟁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김광운은 이러한 북한에서의 활동도 따지고 보면,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더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정치적 아이덴터티를 잃"었으며, 말년에는 "행정관료로 전락"했으니, 북한에서의 행적이 그를 서훈하는 데는 이렇다 할 걸림돌이 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 본다. 


그런 까닭에 김광운의 이 논문은 대단히 정치이데올로기적이며, 나아가 그 개인의 논문이기도 하면서, 김원봉을 서훈하고자 하는 그 진영의 논리를 대변한다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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