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교적 최근까지도, 관청이나 큰 회사에서 퇴임하는 이들에게 문방사우가 든 필묵함筆墨函을 기념품으로 주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런 필묵함은 대개 나무에 옻칠 느낌 나는 진갈색 캐슈칠cashew paint을 발라 처리한다. 그 뚜껑을 열어보면 그 안에 붓이며 먹이며, 연적이며 문진文鎭에 인재印材가 그득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뚜껑 위에 구름 위를 노니는 용을 거하게 돋을새김하곤 하는, 돌로 만든 벼루다.
대량생산하려고 플라스틱으로 용과 구름을 만들고 까맣게 칠해 납작한 돌뚜껑에 붙였다는 말도 있던데, 그럴 거면 뭐하러 무겁게 벼루 뚜껑을 만들까.
어차피 벼루에 앉을 먼지는 필묵함 뚜껑이 가려줄 텐데.
2. 시대가 흘러 그런 고급 필묵함을 주는 곳은 이제 거의 없지 싶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도 드물어진 것이 사실이다.
오죽하면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심심치 않게 나타날까.
이제 작가나 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벼루와 붓을 벗으로 삼을 날은 다시 오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필묵함’을 주고받던 모습만 보더라도 그 옛날 모영毛穎 공(붓)과 석우石友 선생(벼루)을 가까이 하던 시절의 잔영殘影은 생각보다 길었고, 서양 문물이 밀려들어오던 근대에 이르러서도 끊어지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3. 그 ‘필묵함’ 증정 전통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궁금하던 차에 재미있는 물건을 하나 만났다.
넉넉하게 짠 나무함까지 갖춘 벼루 하나다. 함은 좀 이따가 보고 벼루를 먼저 보자.
‘벼루’라고 하지만 벼루라기보다 그 자체가 ‘필묵함’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벼루장인이 녹색, 아니 올리브 그린Olive green 때깔이 묘하게 아롱진 돌을 한 켜 크게 뜯어내었다.
층이 있는 것을 보니 퇴적암 계열인 모양인데, 정확히 어떤 종류의 돌인지는 과학자 여러분께 여쭈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어쨌건 그렇게 뜯어낸 돌을 자연석 느낌이 나게 다듬고(형용모순?) 조각을 베푼다.
살짝 아래쪽에 벼루 역할을 할 연당硯塘과 연지硯池를 둥글게 파고, 그 옆에 길쭉한 공간을 더 팠다. 갈아둔 먹을 걸쳐놓을 곳이다.
그 위와 옆으로 대나무 몇 그루가 훌쩍 솟아난다. 비 온 뒤도 아닌데, 돌의 색 때문인가 제법 싱그러워 보인다.
그런데 볼록하게 새긴 대나무뿐만 아니라 오목하게 판 대나무도 있다. 아마도 여기는 붓을 걸쳐 놓으라고 판 모양으로, 마침 갖고 있던 붓을 가져다 놓으니 딱 들어맞는다.
벼루 위에 뚜껑 하나가 얹힌다. 꽤 얕게 호랑이를 새겼는데, 대나무 숲에서 호랑이가 나오니 맹호출림猛虎出林인가, 그런데 호랑이 위에 둥근 공간 하나가 더 있다.
길쭉한 것이 달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 싶은데, 연당과 연지가 있는 걸 보니 작긴 해도 벼루 역할은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왜 여기 이런 꼬마 벼루를 새겼을까? 그야 모를 일이지만, 아마 빨간 먹[朱墨]을 갈고 교정을 보도록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까 붓을 놓을 수 있게 만든 홈이 두 개였으니, 하나는 검은 붓 하나는 붉은 붓을 놓으라고 한 친절인가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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