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권100, 정세유鄭世裕 열전에 보이는 내용이다.
정세유가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승진하자, 당시 참지정사 상장군叅知政事上將軍인 문장필文章弼 등 여러 장수가 탄핵하여 아뢰기를
“정세유가 예전에 서북면에 있을 때 민에게서 명주실과 진기한 물품들을 거두면서 공물로 바친다고 사칭하고는 역마驛馬를 이용해 제 집으로 실어 보냈습니다. 또 상서성尙書省에 있을 때는, 영주永州의 향리鄕吏 최안崔安의 호장戶長 임명장[公牒]이 이미 완성되었는데도, 정세유가 수주水州의 향리인 최소崔少에게 뇌물을 받고 영永자를 수水자로 고치고 안安자를 소少자로 고쳐, 그 임명장을 최소에게 주었습니다. 일이 발각되었으니 법에 의해 마땅히 유배되어야함에도 잔꾀를 써서 처벌을 면했습니다. 지금 형부상서가 되어서는 먼저 관아에 나와 앉아 있다가 늦게 오는 동료가 있으면 언제나 욕설을 퍼부어 내쫓았습니다.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문서를 뜯어고쳐 법을 우롱하였으며, 뇌물의 많고 적음을 따라 사람의 죄가 왔다 갔다 합니다. 청컨대 먼 섬으로 유배를 보내시어 후세를 경계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1. 상서성에서 호장 임명을 관할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안행부(행안부던가? 워낙 자주 바뀌니)에서 동장을 임명해주는 셈인가?
2.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이 주어지면 휘두르는데 맛을 들이는 사람이 참 많다. (2015. 10. 1)
*** 편집자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정리한 정세유는 다음과 같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서북면병마사·형부상서 등의 벼슬을 지냈다.1184년(명종 14) 서북면병마사로 있으면서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내부內府에 바쳐 왕의 환심을 샀다. 서북면에서 돌아와 아들 정윤당鄭允當을 전조銓曹에 임명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정윤당의 나이가 어리고 지식이 없었으므로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에 임명되었다.1195년 형부상서로 승진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장군 문장필文章弼 등 여러 장군이 "정세유가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을 때 백성들로부터 명주실과 진귀한 물품 등을 거두어들이면서 공물로 바치는 것이라고 사칭하고 역을 통해 그의 집으로 옮긴 점, 형부상서로 있으면서 문서를 뜯어고치고 법을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의 죄를 다룬 죄" 등을 들어 탄핵하여 섬에 유배되었다.그 뒤 풀려났다가 1194년 반역을 도모한다는 대정隊正 이금대李金大의 밀고에 의해서 그 아들 정윤당·정숙첨鄭叔瞻 등과 함께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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