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 거기서 복무하던 어느 일본군이 전역을 했는지 내지內地로 돌아가는지, 하여간 회령을 떠나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에 부대원들이 십시일반(일지, 강제로 뜯어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건)하여 그를 위해 선물을 하나 마련했다.
지금 남아있는 유물로 보면 대개 그런 기념품으로는 욱일승천기와 부대 이름을 새긴 도쿠리[德利]나 술잔 같은 걸 선호했던 듯한데, 여기선 그 선물이 하필이면 벼루라니! 도대체 일본군과는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다.
음, 하지만 ‘일본군’이라는 점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나름 신경 써서 ‘토산품’이라고 고른 것일지도 모른다.
회령 바로 아래 종성鍾城 고을은 조선시대부터 벼루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른바 ‘종성연鍾城硯’은 명성이 높은 편이었다. 그 명성에 살짝 기대기 위함이었는지, 이 벼루함을 준 사람은 이 돌이 ‘회령 두만강산’이요 ‘명연석’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돌 색깔은 약간 푸르스름한 기가 도는 까만색인 종성석의 그것과는 딴판이다.
굳이 얘기하자면 청나라 때 유명했던 송화강松花江 녹석綠石이나 저기 평안도 쪽 위원渭原의 녹석에 견주어야 할까. 하지만 그 두 곳의 돌빛과도 또 다르다.
이른바 ‘회령석’은 사실 이 벼루를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는데, 혹시나 ‘회령석’의 연원을 아는 분이 있다면 가르쳐주셨으면 한다.
만져 보니 무른 느낌이라, 먹이 덜 갈릴 정도로 딴딴한 종성석과는 암질 자체가 달라 보인다.
2. 비단 종성이나 회령뿐 아니라 함경도 쪽 ‘돌(석공예라기에는 약간 뭐하지만)’은 인기가 꽤나 전국적이었다.
일제강점기 제주도 해녀들이 섬을 벗어나 육지로 물질을 하러 다니곤 했는데, 멀리는 일본이나 대만, 러시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런데 육지에 나온 그들이 가장 선호했던 선물이 바로 다듬잇돌이었단다.
제주도 돌은 대부분 구멍 숭숭 난 현무암이라 옷감을 반듯하게 만들기 위한 다듬잇돌로는 적당치 않다.
그렇기에 다듬이질이라는 걸 아예 모르던 해녀들이 육지에 나와 보니 새까맣고 윤이 나는 돌로 다듬잇돌이라는 걸 만들어 또그닥또그닥 옷감을 두드리고 있지 않은가.
“저게 무시겅고?!”
충격을 받은 그들이 고향에 가져갈 선물로 다듬잇돌을 고르는데, 꼭 함경도 청진 다듬잇돌을 사서 돌아갔단다.
청진 쪽에서도 벼루처럼 단단한 돌이 났던 모양이고, 벼루 대신 거기선 다듬잇돌을 주로 만들었던가 보다.
3. 그 모든 사연은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지고, 지금 여기 남은 것은 벼루와 나무 함 하나씩이다.
아마 받은 사람이 받아만 놓고 한 번도 안 썼던지, 벼루 면은 갈린 흔적 하나 없이 맨들맨들하기만 하다.
새것 같은 얼굴의 벼루를 보면서 100여년 전 독립군의 눈물, 국경도시의 천태만상을 생각해 보았다.
이런 벼루가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누구 뜻 있는 분이 있다면 이런 일제강점기 벼루, 벼루문화(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에 관해서 좀 더 자료를 찾아 제대로 된 글을 만들어주셨으면 한다.
한낱 벼루라고 얕볼 것이 아니라, 우리 근대사의 전혀 새로운 부분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사료로서 살필 만한 물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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