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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03] 이집트 상형문자의 쓸쓸한 퇴장(2)

by taeshik.kim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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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프랑스 지도 제작자 기욤 르 테스튀(Guillaume Le Testu: 1509-1573년)가 1556년 출간한 『세계전도』(Cosmographie universelle) 삽화에 묘사된 블레미 족.

 


세 번째 테마 : 이집트 상형문자의 쓸쓸한 퇴장 – 두 번째 에피소드

 


기원후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the Great: 379-395년)는 제국 전역의 이교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당시 로마제국 속주 이집트 역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세라피스 신전(Serapeum)을 비롯한 전국 신전이 폐쇄되었습니다.

 

신전이 폐쇄되었다는 것은 고대 이집트 문명 마지막 보루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외세의 지배 하에서도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던 이집트 문명은 마침내 사멸할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에도 여전히 문을 닫지 않은 신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집트 최남단 필레(Philae) 섬 이시스 대신전(Great Temple of Isis)이었습니다.

 

그렇다면 – 2022년 5월 29일 포스팅한 회차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드린 질문입니다 – 필레 신전이 이렇게 특별한 대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필레의 지리적 특징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제국 중심부인 로마는 물론, 그리고 속주 이집트의 행정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1,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던 필레는 제국의 변방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집트를 속주로 만든 후 이집트 남쪽 누비아까지 로마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북위 20도 이남 누비아 지역은 유럽인들이 쉽게 정복하고 정착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집트와 누비아를 나누는 국경 역할을 한 제1 급류(First Cataract) 너머에 위치한 필레는 제국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둘째로, 필레 주신인 이시스 여신 신앙은 그리스 지배기(기원전 332-30년)부터 그리스 본토 지역으로 전파되다가 로마시대(기원전 30년-기원후 395년)에 이르러서는 지중해 전역으로 확장되었으며 그 결과 제국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 동쪽으로는 그리스, 서쪽으로는 영국과 갈리아(Gaul) 지역까지 퍼졌습니다.

 

따라서 제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던 여신의 신전을 폐쇄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로 정치적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필레 신전이 신전 폐쇄령의 적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블레미 족(Blemmyes)이었습니다.

 

블레미 족은 이집트 남부에서 누비아 북부에 걸쳐 나일강 동부와 홍해(Red Sea) 사이 고지대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이었습니다.

 

그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고대 이집트 문헌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지구의 둘레를 세계 최초로 계산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장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기원전 276-195/194년경)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기원전 3세기경부터 지중해 지역에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기원후 1세기 스트라본(Strabo: 기원전 64/63년-기원후 24년경)이 저술한 『지리학』(Geography)에서 블레미 족은 종종 주변 지역을 습격하는 유목민족으로 묘사되었으며(XVII.53) 이후 이집트 남부접경 지대에 거주하는 “야만인”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박물지』(Natural History)를 저술한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Pliny the Elder = Gaius Plinius Secundus: 23/24-79년)와 같은 로마 작가들은 블레미 족을 얼굴이 가슴에 달린 머리가 없는 인종(akephaloi)으로 묘사했는데(V.46) 이와 같은 묘사는 이후 4-16세기 지중해와 유럽, 그리고 서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공유되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설」(Alexander Romance)과 14세기 『맨더빌 경의 여행기』(The Travels of Sir John Mandeville) 등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래 사진 참조. 참고로 중국에서도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충신인 형천(刑天) 역시 얼굴이 가슴에 달린 전설 속의 블레미 족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블레미 족은 2-3세기 로마제국과 비잔틴 제국에 대항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들 반란은 로마군에 의해 모두 철저하게 진압되었으며 특히 279-2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Marcus Aurelius Probus: 276-282년) 치세에는 로마군에게 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284-305년) 황제 치세에는 다시 테베 지역을 점령했으며 298년에는 로마와 블레미 족을 비롯한 누비아 지역 여러 부족들 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당시 이들의 근거지는 오늘날의 아스완(Aswan) 근처인 칼랍샤(Kalabsha)라는 곳이었는데 칼랍샤 신전(Kalabsha Temple)의 주신은 지난 회차에서 언급한 누비아 태양신 만둘리스(Mandulis)였습니다.

 

만둘리스는 고대 이집트의 호루스와 동일시 되었으며 필레의 이시스 대신전 역시 이시스와 호루스-만둘리스 신이 함께 숭배되었습니다.

 

블레미 족은 1년에 한 번 필레 신전을 방문하여 이시스 여신을 위한 의례를 거행했는데 이것은 로마와의 평화협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 덕분에 필레 신전은 391년 황제의 신전 폐쇄령에도 불구하고 폐쇄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상형문자에 대한 지식 역시 단절되지 않고 – 비록 극소수이긴 했지만 – 다음 세대의 신관들에 전수될 수 있었으며 394년 8월 24일 만둘리스를 기리는 마지막 상형문자가 필레 신전에 새겨졌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395년 동로마와 서로마가 분리되었으며 이집트는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431년 에베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는 성모 마리아가 “테오토코스”(theotokos), 즉 “하느님의 어머니”(Mater Dei)라는 교리를 확정했으나 여전히 논쟁 중심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는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451-452년에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되지 않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느님이라고 하는 양성설을 바탕으로 한 칼케돈 신조(Chalcedonian Definition)가 마침내 정통 교리로 확인됨에 따라 이집트 교회는 단성설(Monophysitism)을 따르는 분파와 비잔틴 황제가 지지하는 양성설을 따르는 분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여기서 양성설을 또 다른 다신교 체제로 여겨 단성설을 고수한 다수파는 이후 콥트 교회(Coptic Church)로 발전했으며, 비잔틴 제국의 양성설을 따르던 소수파는 멜키트 그리스/비잔틴 가톨릭 교회(Melchite)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때부터 콥트 교회는 제국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로스 1세(Dioscorus I: 444-454년) 대주교는 황제에 의해 파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대주교에 오른 친제국파 프로테리오스(Proterius: 451-457년)가 칼케돈 신조를 옹호하자 콥트교회는 자체적으로 티모테오스 2세 아일루스(Timothy II Ailuros: 457-477년)를 대주교로 선출하면서 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분파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와 같은 종교적 혼란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던 필레 신전 전실(pronaos)의 천정에 한 순례자에 의해 마지막 민용문자(民用文字: demotic) 텍스트가 새겨진 것이 452년 12월 11일의 일입니다. 

 

칼케돈 공의회 이후 제국과 콥트 교회와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필레 섬에는 콥트교회가 차례차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잔틴 제국 황제 유스티시아누스 1세(Justinian I: 527-563년)는 535-537년 필레 신전을 폐쇄하고 신관들을 체포 감금하는 한편, 아르메니아(Armenia) 출신 나르세스(Narses: 478-573년) 장군에게 필레 신전의 신상을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져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필레 신전은 이후 성 스데파노(St. Stephen: 5-34년)에게 봉헌되었으며 이후 더 많은 교회가 필레 섬에 건립되었습니다.

 

필레 신전 폐쇄로 고대 이집트의 문자문명도 완전한 종언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성각문자 체계에 대한 지식은 영원히 소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인들이 파피루스에 작성했거나 돌에 새겨 넣었던 수많은 텍스트들은 프랑스 언어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년)이 1822년 9월 27일 「상형문자 음성기호 알파벳에 관하여 다시에 씨에게 보내는 서한」(Lettre à M. Dacier relative à l’alphabet des hiéroglyphes phonétiques)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논문을 통해 상형문자 체계에 대한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 약 1,400여 년 간 긴 침묵 속에 유폐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Christian Jacq: 1947년-현재) 소설 『필레의 사랑을 위하여』(Pour l’amour de Philae)에는 필레 신전이 폐쇄되기 직전의 답답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 작가 소설답게 여신 급 미모를 소유한 여신관과 그녀와의 첫 번째 만남에서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된 비잔틴 제국 총독 막시무스(Maximus)와 같은 등장인물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상형문자 #필레 #이시스 #만둘리스 #블레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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