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 시대의 발명품 “탈라타트” 벽돌
오늘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유물은 “탈라타트”(talatat) 벽돌입니다.
이 벽돌은 공사장 인부들이 혼자서도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석회암(limestone)이나 사암(sandstone)을 가로 세로 두께 1/2 x 1/2 x 1 큐빗(cubit), 즉 27.5 x 27.5 x 55 센티미터 크기로 만든 것을 말합니다.
이 명칭은 아랍어로 “셋”을 뜻하는 تلاتة “탈라타”에서 유래하는데 그 이유는 벽돌 크기가 대략 손바닥 세 배 크기였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탈라타트 벽돌은 신왕국 시대 제18 왕조 열 번째 파라오인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Amenhotep IV/Akhenaten: 기원전 1352-1336년) 치세를 대표하는 건축자재입니다.
이 탈라타트 벽돌이 고대 이집트 역사에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멘호텝 4세가 부왕 아멘호텝 3세(기원전 1390-1352년)와의 짧은 공동통치(co-regency) 기간을 끝내고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집트는 고대 근동 대제국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국가로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국경 북쪽 시리아-팔레스타인과 남쪽 누비아(Nubia) 지역에 대한 정복전은 우리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년)에 해당하는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기원전 1479-1425년)와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 기원전 1427-1400년) 치세에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멘호텝 4세의 할아버지 투트모세 4세(Thutmose IV: 기원전 1400-1390년) 치세부터는 왕실 간 국제결혼을 통한 강대국 간 동맹이 이집트 외교의 기본 방침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공적 사적으로 가장 적극 활용한 파라오가 바로 부왕 아멘호텝 3세였습니다.
이처럼 평화가 지속되고 속국으로부터의 조공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집트 경제 역시 비약적인 성장세를 기록했습니다.
이런 물질적 풍요를 가장 크게 누린 곳이 바로 전국에 산재한 신전들이었습니다.
특히 국가신으로서 nswt-nṯrw “신들의 왕”으로 불렸던 아문-레(Amun-Re)를 모신 테베(Thebes)의 카르낙 대신전(Great Temple of Karnak)은 제18 왕조 전반에 걸친 지속적인 증축과 개축 덕분에 규모가 유례 없이 팽창했을 뿐만 아니라 신전이 소유한 농지와 목초지, 그리고 선박·(목공장·대장간·직조장 등과 같은) 공방 + 장인·창고·(신전 인근의 마을에 거주한) 농노·가축·곡물 등과 같은 유무형 자산 역시 엄청난 규모로 확장했습니다.
제정일치 체제였던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전제군주인 동시에 최고위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독보적인 종교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특정 신의 대중적 인기와 위상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그에 따라 그 신을 모시는 신관단의 경제적 영향력과 정치적 입지도 덩달아 커지는 사태는 파라오에게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사실 번영을 구가한 시기에 이집트를 다스린 왕이라면 누구나 직면했던 문제였습니다.
왕들은 대개 전통적인 다신교 체제를 영리하게 이용함으로써 이와 같은 상황을 해결해 나갔습니다.
요컨대, 어떤 신과 그를 모시는 신관단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졌다고 판단되면 그와 비슷한 지위와 신격을 가진 다른 신과 신관단에 대한 왕실의 지원을 의도적으로 늘림으로써 신들 사이의 권력 – 그리고 왕권 간 균형을 맞춘 것입니다.
한데 아멘호텝 4세가 선택한 방법은 이런 온건한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아문-레를 비롯한 이집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자신이 숭배 대상으로 삼은 단 한 명의 신, 즉 아텐(Aten)이라는 태양신만을 숭배하는 전례 없이 과격한 정책을 통해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신교 혁명”(monotheistic revolution)입니다.
즉위 후 처음 5년 간은 비교적 신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카르낙 대신전에 아텐을 위한 건축활동을 전개하여 신전 경내에 “아텐께서 발견되시다”라는 뜻을 가진 “겜파아텐”(Gempaaten)과 “최초로 솟아난 땅의 영지”를 의미하는 “후트-벤벤”(Hut-Benben)과 같은 아텐을 위한 새로운 부속 신전들을 건설하는 것으로 일단 만족했습니다.
이들 부속 신전들이 정확히 어디에 건설되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모두 태양이 뜨는 카르낙 대신전 동쪽 면에 인접하여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부속 신전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 각종 도상(iconography)과 조형예술 양식이 이집트 문명의 여명기에 수립 전승되어오던 기존 예술원칙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차이를 보여주며, 이런 차이는 분명 아멘호텝 4세의 새로운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수립하고자 한 새로운 신앙체계에서 “숨겨진 신”(Hidden One)이었던 아문-레는 누구나 그 존재를 매일 한 치 의심 없이 확인할 수 있는 “태양원반”(solar disc)인 아텐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멘호텝 4세는 창조의 기본적인 원리와 창조된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아문-레는 인간은 물론, 다른 신조차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숨겨진” 신비한 존재여야 한다는 기존 종교관을 전복합니다.
그와 동시에, 명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뚜렷한 천체인 “태양원반과 그 원반에서 매 순간 방사(放射)해서 나오는 가시적인 생명의 빛”이라는 새로운 신격을 가진 아텐을 이제는 텅 비어버린 이집트 만신전(pantheon)의 중심에 모셔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가시적이며 파악 가능한 태양원반이 구현하는 현재의 순간 – 즉, “지금-여기”(here and now)에 초점을 맞추는 “종교개혁” 시대의 새로운 관점과 삶의 방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의 영역을 넘어 건축 조형예술 문자문화 등 이집트 문화 전반에 걸쳐 확장합니다.
조형예술 부문에서는 시간의 경과가 사물에 미치는 작용을 배제함으로써 영원히 이상적인 모습만을 묘사하고자 한 기존 예술원칙에서 탈피하여 빛을 통해 묘사된 현재의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합니다.
문자문화에서는 모든 문서가 고전어로 여긴 중기 이집트어(Middle Egyptian)로 저술하던 관례에서 탈피하여 일상, 즉 “지금-여기”에서 사용되는 구어였던 후기 이집트어(Late Egyptian)가 문어체로 새롭게 편입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매일 아침 세계를 재창조하고 밤의 무질서를 바로 잡는 아텐의 빛 아래에서 전개되는 매 순간은 자연과 인간의 창조가 반복되는 신성한 순간이며 매일 재현되는 창조의 순간, 즉 “최초의 순간”(First Occasion)으로 해석되었으며
그 결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매체를 통해 재현되어야 할 대상은 내세의 망자들을 위한, 시간이 배제된 완벽하고 이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태양빛 아래 현재 진행 중인 창조주의 지속적인 창조행위,
다시 말해 감각 – 특히, 시각 – 을 통해 바로 확인 가능한 “지금-여기”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요컨대, “종교개혁” 시대의 문학과 예술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순간을 포착하고 묘사하는 데 오롯이 집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위 5년에 접어들면서 아멘호텝 4세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합니다.
그는 아문의 종교 중심지였던 남부의 테베, 프타(Ptah)의 성도(聖都)이자 행정수도였던 북부의 멤피스(Memphis) 등과 같은 오랜 역사를 지닌 – 따라서 이미 주신(主神)이 존재하는 – 도시들에서 탈피하여 그 어떤 신에게도 바친 적이 없는 이집트 중부의 처녀지에 새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심합니다.
“아텐의 지평선”(Horizon of Aten)을 의미하는 “아케트-아텐”(Akhetaten)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이 신도시는 약 4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도시 외곽에는 경계비가 세워졌습니다.
아케트-아텐은 착공된 지 2년 뒤부터는 이미 수도로서 기능하기 시작했으며 왕실과 왕 측근을 비롯한 약 2-4만 명의 이집트인이 순차적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도(遷都)의 시기와 맞물려 아멘호텝 4세는 자신의 탄생명(birth name)을 “아문 신께서 만족하시다”는 뜻의 jmn-ḥtp.(w) “아멘호텝”에서 “태양원반을 위한 유용한 권능을 가진 자”라는 뜻의 Aḫ-n-jtn “아켄아텐”(Akhenaten)으로 바꿈으로써 아문-레를 비롯한 모든 전통적인 신들과의 결별을 공식화하고 아텐만을 향한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했습니다.
탈라타트 벽돌이 이집트 공사장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도, 그리고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 치세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가 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 기인합니다.
단기간에 도시 하나를 새롭게 조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견고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짓는 데 사용한 기존 거대한 석재 블록 대신 내구성은 좀 떨어지지만 한 사람의 노동자가 운반할 수 있는 소형 석재 벽돌인 탈라타트가 선택된 것입니다.
이미 카르낙 대신전에 겜파아텐과 후트-벤벤을 건설하는 데 사용한 탈라타트 벽돌은 새로운 수도인 아케트-아텐이 허허벌판이던 처녀지에서 4년이라는 이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는 과정에서 그 진가를 유감 없이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파라오의 과감하고 신속한 결단에도 불구하고 – 어떻게 보면, 그 지나친 과감함과 신속함으로 인해 –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의 “종교개혁”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기원전 1336년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이 죽자 얼마 뒤 수도였던 아케트-아텐 – 현재의 지명은 텔 엘-아마르나(Tell el-Amarna)입니다 – 역시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유령도시가 된 아케트-아텐의 탈라타트는 인근 대도시 헤르모폴리스(Hermopolis) 주민들에 의해 건축자재로 재활용되었습니다.
카르낙 대신전 경내에 건설된 겜파아텐과 후트-벤벤의 사암 탈라타트 역시 신왕국 시대 제18 왕조 마지막 파라오 호렘헵(Horemheb: 기원전 1323-1295년)이 카르낙 신전 제9 탑문(Ninth Pylon)을 건설할 때 해체되어 탑문 내부 충전재(充塡材)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 전 세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탈라타트 벽돌은 거의 모두 이 제9 탑문과 텔 엘-아마르나 혹은 헤르모폴리스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탈라타트 벽돌 역시 독일 고고학 발굴팀이 1939년 헤르모폴리스에서 발굴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의 즉위명(throne name)인 “네페르케페루레-와엔레”(Neferkheperrure-waenre) = “태양신의 변신은 완벽하시다, 태양신의 독보적인 존재”와 개명한 탄생명 “아켄아텐”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새겨져 있습니다.
마치 직소 퍼즐(jig-saw puzzle)처럼 다른 탈라타트 벽돌들과 정교하게 맞물려 아케트-아텐 왕궁이나 아텐 대신전(Great Temple of Aten)의 화려한 외관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돌에 새겨진 왕명 중 일부는 훼손되었지만 그 코발트 빛 푸른색은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 당시의 영화를 상징하듯 아직도 생생합니다.
2023년 5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개관하면 여러분 모두 이 벽돌 실물을 박물관에서 직접 감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탈라타트 #아텐 #아멘호텝4세 #아켄아텐 #일신교혁명 #아케트아텐 #헤르모폴리스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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