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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02] 상형문자의 씁슬한 퇴장(1)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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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두 번째 테마: 이집트 상형문자의 쓸쓸한 퇴장 - 첫 번째 에피소드


기원후 394년 8월 24일. 이집트 최남단 필레(Philae)에 위치한 이시스(Isis) 신전. 

 

이집트를 사랑한 로마 황제 하이드리아누스(Hadrian: 117-138년)가 건립한 “하이드리아누스 대문”(Hadrian’s Gate) 벽면에 세로로 2열이 조금 넘는 분량의 짧은 상형문자 텍스트가 새겨졌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이시스 여신 차석신관이자 문서의 집 서기관 네스메테르앙크엠이 만둘리스를 위해 작성한 상형문자 및 민용문자 텍스트. 왼쪽으로 훼손된 만둘리스의 형상이, 오른쪽 위에 상형문자 텍스크가 그 아래에 민용문자 텍스트가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필레의 이시스 대신전, 로마 지배기(기원전 30년-기원후 395년) 기원후 394년 8월 24일.

 

 

 

이시스 여신 차석신관(Second Priest of Isis)이자 문서의 집 서기관(Scribe of the House of Writings)이던 네스메테르앙크엠(Nesmeterankhem)이 만둘리스(Mandulis)라는 신을 위해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만둘리스는 오늘날의 수단(Nubia) 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누비아(Nubia)에서 널리 숭배된 태양신으로서 대개 태양원반과 옆으로 넓게 퍼진 숫양의 뿔, 그리고 깃털과 코브라 등으로 장식된 관을 쓴 사람 모습 혹은 이집트 태양신이자 천신(天神)인 호루스(Horus)와 마찬가지로 매 머리를 한 사람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상형문자가 새겨진 세로단 아래에는 당시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민용문자(民用文字: demotic) 텍스트가 상형문자 텍스트보다 좀 긴 분량으로 새겨졌는데 이 민용문자 텍스트 말미에 이들 텍스트가 새겨진 날이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284-305년) 황제 치세 100년째가 되는 해 오시리스(Osiris)의 탄생 축일이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날, 기원후 394년 8월 24일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새겨진 날이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네스메테르앙크엠을 비롯한 이집트 마지막 신관 세대가 소멸하면서 상형문자에 대한 지식은 인류사에서 영원히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문자는 언뜻 당대의 제도나 규범과는 별도로 작동하는 독자적인 문화현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자는 그것이 사용되는 제도나 종교와 같은 중요한 문화적 요소와 언제나 불가분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사용되는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적 문화적 변화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 문자가 태동하고 발전, 소멸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어 그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상형문자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하게 퇴장할 수밖에 없던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은 어땠을까요? 


우선 상형문자 체계 자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상형문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고왕국시대(기원전 2686-2160년)부터 상형문자 정자체와 흘림체인 신관문자(神官文字: hieratic)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상형문자 정자체는 신전과 분묘와 같은 건물 벽면에 새기거나 그린 반면, 신관문자는 각종 행정업무를 비롯한 일상적인 업무를 위해 펜과 잉크로 파피루스에 썼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이 두 문자 체계를 모두 알고 있었으며 이들 텍스트에서는 상형문자와 신관문자의 1:1 대응, 요컨대 상형문자를 신관문자로, 역으로 신관문자를 상형문자로 한 글자씩 교체하는 것이 모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민용문자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후기왕조시대 제26 왕조 프삼테크 1세(Psamtek I: 기원전 664-610년) 치세 말엽부터 독자적인 문자체계로 변모한 민용문자는 이후 이집트 전역에서 행정문서와 서신 등을 작성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흘려 쓴 정도가 신관문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심해 문자가 한 글자씩 기입되는 대신 단어 전체가 몇 획으로 뭉뚱그려 그려졌습니다.

 

따라서 민용문자는 신관문자와 달리 상형문자와의 1:1 대응이 불가능했습니다.

 

더구나 후기왕조 시대 서기관들은 더 이상 상형문자 체계를 신관문자와 함께 배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상형문자가 극소수의 신관만 읽고 쓸 수 있는 매우 난해한 문자체계로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로마 지배기(기원전 332년-기원후 395년) 신관들은 약 600개 정도였던 전통적인 상형문자 수를 1,000개 이상으로 늘렸으며 기존 표음문자 체계에 상징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일반인들은 물론, 민용문자를 구사할 수 있던 교육 받은 서기관조차 읽을 수 없는 자신들만의 독점적인 문자체계로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더 흘러 로마 제국 종교인 기독교가 이집트에 유입되면서 그리스 자모를 차용한 콥트(Coptic) 문자가 기존 문자체계를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선 회차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콥트문자는 알파(α)에서 오메가(ω)에 이르는 그리스 자모에 이집트어 고유의 음을 표기할 수 있는 자음 6개 – 샤이(shai) 파이(fai) 호레(horeh) 잔자(djandja) 퀴마(kyima) 티(ti) – 가 추가된 문자체계입니다.

 

콥트문자가 도입되면서 기원후 1세기 이후에는 민용문자조차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으며 기원후 4세기부터는 콥트문자가 기독교 문화권뿐만 아니라 대다수 이집트인 일반적인 문자체계로 널리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반면, 이 시기 상형문자는 한 줌의 배타적인 신관들 사이에서만 비밀스럽게 전수되는 신비하고 상징적인 문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상형문자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최전성기를 구가한 신왕국시대(기원전 1550-1069년) 이후 약 1,300년 간 점진적인 쇠락의 길을 걷다 마침내 절멸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징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일례로, 기원후 394년 8월 24일 새겨진 마지막 상형문자 텍스트 바로 직전의 덱스트가 새겨진 시기는 그 보다 40년 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 상형문자 텍스트가 새겨진 후 다음 텍스트가 새겨지는 데 한 세대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민용문자 역시 이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민용문자가 마지막으로 새겨진 것은 기원후 452년 12월 11일이었습니다.

 

민용문자가 새겨진 장소 역시 필레의 이시스 대신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용문자가 새겨진 곳은 신전 본체 건물의 전실(pronaos) 천정이었습니다. 


이처럼 상형문자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이미 쇠락의 단계로 접어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형문자의 존속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정치적 제도적 변화였습니다.

 

우선 이집트의 지배적 종교가 바뀌었습니다.

 

기원후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the Great: 306-337년)가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통해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 중 하나로 공인한 이후 기독교는 제국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기원후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the Great: 379-395년)는 데살로니카 칙령(Edict of Thessalonica)을 통해 마침내 기독교 – 특히, 니케아 공의회(First Council of Nicaea) 공인을 받은 기독교 – 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포했습니다.

 

이어 기원후 391년에는 제국 전역의 이교 신전을 폐쇄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속주였던 이집트 역시 황제 명령에 따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세라피스 신전(Serapeum)을 비롯한 전국의 신전들이 폐쇄되었으며 신관들은 체포되거나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수천 년간 이어져온 고대 종교의 빈 자리를 이제는 콥트 교회(Coptic Church)가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필레 신전에서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새겨진 것은 신전폐쇄 명령이 내려진 후 3년이 지난 394년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이시스 여신 차석신관이던 네스메테르앙크엠이 폐쇄된 신전에 몰래 잠입하여 상형문자와 민용문자 텍스트를 새긴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오시리스의 탄생 축일에 맞춰 그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만둘리스를 찬양하는 문장을 신전 벽면에 새기는 작업을 자신의 신성한 업무 중 하나로서 당당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렇다면 필레 신전은 391년에 내려진 황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폐쇄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필레 신전은 이집트의 다른 모든 신전들이 폐쇄된 이후에도 예외적으로 폐쇄를 면하고 신전의 기능을 정상적인 유지했습니다.

 

그렇다면 필레 신전이 이렇게 특별한 대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회차로 이어집니다.


필레 신전과 상형문자의 최후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회차로 이어집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형문자 #필레 #이시스 #네스메테르앙크엠 #만둘리스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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