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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04] 이집트 상형문자의 쓸쓸한 퇴장(3)

by taeshik.kim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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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세 번째 테마: 이집트 상형문자의 쓸쓸한 퇴장 – 세 번째 에피소드


앞선 회차에서 살펴본 것처럼 394년 8월 24일 마지막 상형문자 텍스트가, 452년 12월 11일 마지막 민용문자(Demotic) 텍스트가 필레(Philae)의 이시스 대신전(Great Temple of Isis)에 각각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들 문자체계에 대한 지식이 소멸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관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집트 문자는 동시대 다른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소멸 뒤에도 다양한 모방과 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선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1069년)에 해당하는 중기 청동기 시대(Middle Bronze Age)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모방한 도안들이 일부 원통형 인장(cylinder seal)에 사용되었는데 이들 인장의 상형문자 도안은 상류층의 미적 감수성과 이국적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한편, 소유자의 위신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채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 형태나 배치 등으로 보아 상형문자 체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상형문자 체계에 대해 이와 같은 표면적인 호기심 이상의 관심과 존경을 보인 민족은 그리스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이집트와 그리스 문화가 활발하게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후기왕조 시대 제 26 왕조 네카우 2세(Nekau II: 기원전 610-595년) – 『구약성서』 「열왕기하」 23:29; 23:33-34, 「역대하」 35:21-23, 「예레미야」 46:2 등에 “느고”로 언급된 왕입니다 – 치세에 그리스인들을 위한 교역도시 나우크라티스(Naukratis)가 삼각주 지대에 건설되면서부터입니다.

 

이후 두 문명 간 상업적 관계는 문화 부문으로까지 확장되었는데, 그리스인들은 자신보다 훨씬 먼저 고도의 문명을 건설한 이집트인들에 대해 존경심과 함께 서구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이질감을 동시에 품고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 역사 저술가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전 484-425년)는 『역사』(Histories)에서 자신이 접한 상형문자 체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II.36):

 

“헬라스인들은 문자와 숫자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지만, 아이귑토스인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은 오른쪽으로 썼고, 헬라스인들은 왼쪽으로 썼다고 우긴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문자가 있는데, 하나는 ‘신성 문자’(ἱεροί)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통속 문자’(δημοτικά)로 불린다.”

 

여기서 “신성 문자”는 상형문자 정차체를, “통속문자”는 당시 이집트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민용문자를 각각 지칭합니다.

 

그러나 이집트 문자체제에 대해 나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한 그리스 학자들에게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집트어에 대한 직접 지식이 없었습니다.

 

요컨대, 이집트 문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전제조건이라 할 수 이집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그리스 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그 결과 상형문자 체계에 대한 그리스의 고전작가들의 인식은 대부분 현지 이집트인들의 풍문에 근거한 피상적 정보나 신관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이후 상형문자 체계에 대한 지식이 소멸한 뒤에는 이들 문자를 순수한 상징 혹은 비밀스러운 지식에 대한 시각적 우의(寓意: allegory)로 보는 “철학적” 접근방법이 대세를 이루었으며 이와 같은 접근방법은 1822년 프랑스 언어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년)이 상형문자 체계의 기본 법칙을 재구성하기 전까지 유럽의 학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가 로마제국의 황제 직할 속주가 된 이후 이집트에 대한 로마인들의 태도 역시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양가적(ambivalent)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 역시 한편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찬란한 문명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한편, 자신들이 납득할 수 없었던 서아시아의 “불합리한” 풍습과 심성에 대해서는 “야만적”(barbaric)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이 문자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 전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된 이시스(Isis) 여신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국가적으로 가이우스(Gaius) = 칼리굴라(Caligula: 37-41년) 황제는 로마 시내에 이시스 여신의 신전을 건립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년) 도미티아누스(Domitian: 81-96년) 하드리아누스(Hadrian: 117-138년)와 같은 황제들 역시 이시스와 함께 당시 이집트의 최고신이었던 세라피스(Serapis) 신앙을 황실 차원에서 후원했습니다. 한편, 카라칼라(Caracalla: 211-217년) 황제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퀴리날리스 언덕(Quirinal Hill)에 이시스 여신 신전을 건립하는 동시에 그녀를 로마의 국가신 중 한 명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집트 성각문자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30년-기원후 14년)의 선례는 문자의 역사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obelisk)를 로마 광장에 세운 첫 번째 황제였습니다. 

 

그의 선례에 따라 로마에는 무려 42개에 달하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집트에서 수입할 수 있는 적당한 오벨리스크 수가 부족해졌는데 로마의 황제와 귀족들은 오벨리스크를 자체 제작하는 방법으로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나 이탈리아 본토 채석장에서 오벨리스크 모양으로 다듬은 방첨탑(方尖塔)을 제작하여 로마로 운송했는데 문제는 오벨리스크 표면에 새겨질 텍스트였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부터는 당시 행정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나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이집트 신관들에게 상황과 맥락에 맞는 상형문자 문구를 작성해줄 것을 의뢰함으로써 텍스트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세워진 것 중 하나가 바로 현재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입니다[아래 사진 참조].

 

 

로마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 광장에 서 있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 81-96년) 황제의 오벨리스크. 원래는 막센티우스의 서커스(Circus of Maxentius)에 건립되었으나 이후 파괴되어 수세기에 걸쳐 매몰되어 있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Pope Innocent X: 1574-1655년)에 의해 1649년 출토되었으며 1651년 나보나 광장에 세워졌습니다.

 

앞서 언급한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로마황실과 상류층은 이국적이면서 신비로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채택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신과 권위를 높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인 이집트 태양신 호라크티(Horakhy)에게 봉헌된 이 오벨리스크 텍스트에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Titus: 79-81년)와 같은 전임 황제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들에 대한 호칭이 정확하다는 점, 그리고 문체 역시 전통적인 고대 이집트의 봉헌문(votive text)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텍스트는 상형문자 체계를 잘 알고 있는 이집트 신관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입체감이 없이 납작하고 좌우로 과도하게 퍼진 문자 형태는 이집트 본토 상형문자와는 상당히 다른 인상을 주는데 그 이유는 이 텍스트가 이집트 장인들이 아니라 이와 같은 오벨리스크 제작을 전담한 로마 장인들에 의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총애를 받다 나일강에서 익사한 안티노오스(Antinous: 111-130년)를 기리기 위해 로마에 기념묘지(cenotaph)를 조성했는데 이때 핀초 언덕(Pincian Hill)에 세운 오벨리스크 역시 이집트 상형문자의 변용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줍니다.

 

일단 이 오벨리스크 역시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인 태양신 호라크티에게 봉헌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텍스트의 화자는 황제가 아니라 “오시리스 안티노오스”(Osiris Antinous)입니다.

 

마치 고대 이집트 귀족의 자전적 기록(autobiography)에서와 같이, 영생을 얻어 신의 지위에 오른 안티노오스는 자신은 토트(Thoth) 신에 의해 영생을 누리게 되었으며 이집트 신 중 한 명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한편, 호라크티에게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축복해줄 것을 청원합니다.

 

이와 같은 텍스트는 오벨리스크를 봉헌하는 주체인 파라오만이 배타적으로 언급되는 고대 이집트의 전통적인 봉헌문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텍스트에 사용된 상형문자의 철자와 문자들 사이의 구성에서는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며 관용적으로 사용되던 문구를 자의적으로 이리저리 결합한 모습 역시 상당히 많이 눈에 띕니다.

 

요컨대, 당시 로마인들에게 보다 중요했던 것은 상형문자 텍스트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림문자가 가진 시각적 장식적 기능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보편화해서 결국에는 이집트 풍 이미지와 도안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형문자 혹은 상형문자처럼 보이는 그림들을 결합하는 방법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경향은 근대와 현대 유럽에 고대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집트 열풍”(Egyptomania)이 주기적으로 찾아올 때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중세 아랍 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상형문자 체계에 대한 연구성과와 로마에서 시작된 상형문자의 장식적 모방과 변용이 어떻게 현대에 까지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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