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07] 로제타 석비 정주행 그 첫 번째 이야기 : 발견

by taeshik.kim 2023. 11. 1.
반응형

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로제타석” 혹은 『로제타 석비』(Rosetta Stone)는 고대 이집트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입니다. 

 

고대 이집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로제타 석비』가 상형문자 해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대 이집트 문명에 많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로제타 석비』는 매우 친숙한 유물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너무 친숙한 나머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로제타 석비』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제 스스로 자문해 보았습니다.

 

2023년 5월 개관하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이 『로제타 석비』의 정교한 복제유물을 전시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겸사겸사 이번 주말에는 2회에 걸쳐 『로제타 석비』를 정주행해볼까 합니다.

 

모쪼록 페친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1789년 7월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발생하면서 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수립되는 한편, 1793년 1월 루이 16세(Louis XVI: 1774-1793년)가 파리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사태 추이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와 같은 유럽 강대국들은 프랑스에 즉각 선전포고를 했고 그 결과 국내에서의 혁명전쟁은 바야흐로 국제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79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혁명전쟁에 자신감이 생긴 프랑스 정부는 지중해 무역로를 장악하는 동시에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이집트를 통해 인도와 교역하던 영국을 견제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였으며 이에 따라 1798년 프랑스 혁명군을 이집트에 파병하기로 결정합니다.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유럽에서 이집트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이유는 원정군 사령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년)가 이집트 원정을 계획할 때 군인들뿐만 아니라 화학자 지질학자 건축가 화가 등으로 구성된 학술 조사단을 대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 학술 조사단은 이집트 곳곳을 방문하여 다양한 지리 정보를 수집하고 유적지를 탐사했는데 이들의 성과는 1809-1829년에 걸쳐 출간된 『이집트지誌』(Description de l’Égypte)를 통해 집대성되었습니다.

 

『이집트지誌』는 크게 「고대편」(Antiquities)  「현대편」(Etat Moderne) 「자연지편」(Histoire Naturelle)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고대편」은 고대 이집트의 유적을 매우 치밀하게 묘사하여 지금의 기록사진과 비교해도 그 정확성이 뒤지지 않을 다수 동판화가 조사보고서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세한 보고서와 삽화들은 유럽 전역에 다시 한번 "이집트 열풍"(Egyptomania)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에도 현대 이집트학을 탄생시킨 기념비적 대작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은 『이집트지誌』 편찬이라는 학술적 성과 이외에도 『로제타 석비』 발견이라는 고고학적 성과도 일구어냈습니다.

 

『로제타 석비』는 1799년 7월 중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소속 공병대 장교 피에르-프랑수아 부샤르(Pierre-François Xavier Bouchard: 1772-1832년)가 북부 삼각주 지대에 위치한 엘-라시드(el-Rashid)에서 상 줄리앙 요새(Fort St. Julian)의 확장공사를 진행하던 도중 발견되었습니다.

 

부샤르는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비롯한 여러 문자가 새겨진 석비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상관 장-프랑수아 므누(Jean-François Menou: 1750-1810년) 장군에게 지체 없이 보고했습니다.

 

장군은 석비를 자신의 주둔지로 옮기게 한 후 하단의 그리스어 텍스트를 번역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석비가 발견된 요새 주변을 수색하여 석비 나머지 부분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이집트 원정 기간 동안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나폴레옹이 1798년 설립한 카이로의 이집트 학사원(Institut d’Égypte)은 7월 19일 회동을 갖고 이 석비를 카이로로 이송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8월 중순 부샤르가 직접 석비를 학사원에 인도했습니다. 


석비를 조사한 학사원 학자들은 이 석비가 그리스 지배기에 이집트를 다스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Ptolemy V Epiphanes: 기원전 205-180년)가 기원전 196년 멤피스(Memphis)에서 반포한 왕실 포고문이라는 사실과 함께,

 

상단은 14행 분량의 이집트 성각문자 텍스트가, 중간에는 – 발견 당시 시리아어(Syriac)라고 잘못 알려진 – 32행 분량의 민용문자(民用文字: Demotic)가, 그리고 맨 아랫단에는 54행 분량의 그리스 문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민용문자는 기원전 650년경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후기 이집트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한 문자체제를 말합니다.]

 

 

1800년 1월 24일 원정대 학술 조사단 일원 인쇄업자 장-조셉 마르셀(Jean-Joseph Marcel: 1776-1854년)에 의해 탁본(拓本), 즉 복사본이 만들어졌으며 이들 복사본은 그해 가을 파리로 보내졌습니다.

 

약 23년 뒤인 1822년 프랑스 젊은 언어학자 장-프랑수와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년)에 의해 상형문자 체계가 마침내 해독되었을 때 그가 원본이 아닌 이들 탁본 중 하나를 참고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이 제작한 탁본은 원문에 상당히 충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01년에 접어들면서 전선의 프랑스 원정군 부대들은 하나 둘씩 영국과 오스만 제국의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므누 장군은 알렉산드리아에 결사항전의 투지를 불사르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3월에는 알렉산드리아 근처 아부키르 만(Abu Qir Bay)에 영국군이 상륙했으며 이어 고대 도시인 카노푸스(Canopus)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카이로의 이집트 학사원은 알렉산드리아로 피난했는데 이때 『로제타 석비』 역시 학자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로서는 이것이 결정적이 패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석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는 바람에 석비가 프랑스 본토로 조속히 이송될 기회를 놓쳤고 그 결과 석비는 이후 프랑스와 영국 간 최종 항복협정 적용을 받지 못하고 영국군에게 몰수당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카이로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경우, 항복 조건으로 무기와 각종 장비를 비롯한 소유물을 영국군으로부터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었는데 만일 석비가 이때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지 않았다면 이후 프랑스로 이송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므누 장군은 카이로에서의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영국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 8월 31일 마침내 항복했습니다.

 

이때 체결된 「알렉산드리아 항복협정」 제16 조에 따라 영국군의 존 헬리-허친슨(John H. Hutchinson: 1757-1832년) 장군은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입수한 모든 유물을 영국으로 넘기라고 요구했고, 이 사안에 대해서는 므누 장군도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원정대 학술 조사단 소속 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당시 프랑스 학자들이 가장 우려하고 있었던 것은 『이집트지誌』 「자연지편」 출간을 위해 수집해둔 자료를 모두 빼앗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대표단을 꾸려 제7대 엘긴 백작(7th Earl of Elgin)의 지시로 – 맞습니다. 영국박물관 유명한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의 주인공 엘긴입니다 – 마침 이집트에 와있던 영국의 골동품 수집상이자 외교관이었던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과 담판을 짓게 되는데 – 이때 프랑스 학자들은 해밀턴에게 영국 측에 학술자료를 내어주느니 차라리 소각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 해밀턴은 이들이 수집한 학술자료는 “사유재산”으로 인정하여 몰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므누 장군은 9월부터 『로제타 석비』를 비롯한 이집트 유물들 역시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했습니다만 그의 요청은 거절당합니다. 

 

이제 석비는 영국군의 톰킨스 힐그로브 터너(Tomkyns Hilgrove Turner: 1766-1843년) 대령이 맡게 되었는데 1801년 말 그는 석비를 영국전함 레집시엔느(HMS L’Égyptienne)에 싣고 영국으로 출항했습니다. 

 

1802년 2월 석비는 마침내 영국 남부 군항 포츠머스(Portsmouth)를 통해 영국 땅을 밟게 되었으며 3월 11일부터는 터너 자신이 회원으로 소속된 런던 유물 연구회(Society of Antiquaries of London)의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연구회는 7월 석비의 석고모형을 제작하여 옥스퍼드(Oxford) 캠브리지(Cambridge) 에든버러(Edinburgh) 더블린(Dublin) 등지의 대학에 보냈으며 석비에 새겨진 텍스트 인쇄본을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석고모형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제작되었는데 이 중에는 당시 "적국"이었던 프랑스에 제공된 것도 있었습니다. [사실 요령 좋은 프랑스 학자들은 석비가 영국 전함에 실려 런던으로 운송되기 전에 영국 측 허락을 받아 석고모형을 만든 전력이 있었습니다.] 『로제타 석비』는 1822년 마침내 『이집트지誌』 제5권의 52-54번 삽화로 출간되었습니다.


1802년 6월 영국 국왕 조지 3세(George III: 1760-1820년)는 『로제타 석비』를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에 공식적으로 공여했으며 석비는 19세기 중반 “EA 24”이라는 소장품 목록번호를 부여 받았습니다.

 

1972년 샹폴리옹의 상형문자 체계 해독 150주년을 맞아 프랑스 파리에서 잠시 전시된 것을 제외하고 석비는 1802년 이후 이후 지금까지 영국박물관을 대표하는 소장품 중 하나로 자랑스럽게 전시되고 있습니다.

 

석비에 대한 영국의 애착은 석비 측면 하단에 쓰여진 문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석비 왼쪽 측면에는 “CAPTURED IN EGYPT BY THE BRITISH ARMY 1801” = “1801년 영국군에 의해 노획(鹵獲)됨,” 오른쪽 측면에는 “PRESENTED BY KING GEORGE III” = “조지 3세 폐하께서 공여하심”이 각각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당사자이면서도 석비 발견에서 이송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나라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집트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관리할 관심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 열강이 자신들의 유물을 마음대로 반출하는 것을 두 눈 뜨고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씁쓸한 일화가 있습니다.

 

므누 장군이 어떻게든 『로제타 석비』를 프랑스로 가지고 가기 위해 영국 측과 벌인 협상이 결렬되자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Jamais on n’a pillé le monde!” = “세상이 이렇게 강탈당한 적은 없었다!”

 

므누 장군은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강탈한 석비가 원래는 자신들이 이집트로부터 강탈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로제타 석비』에 적힌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이집트원정 #이집트학사원 #로제타석비 #샹폴리옹 #부샤르 #영국박물관 #로제타스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