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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09] 고대 이집트 의학 전문서 에베르스 파피루스

by taeshik.kim 2023.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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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고대 이집트의 의학 전문서 『에베르스 파피루스』 – 첫 번째 이야기: 고대 서아시아의 의료 선진국

 


고대 이집트의 심오한 지혜와 뛰어난 학문적 성취 – 특히, 수학 의술 건축 관련 지식 – 는 서아시아 전역에 걸쳐 경탄과 부러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지식에 대한 인접 국가들의 이런 태도는 한때 이집트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모세(Moses)에 대한 『신약성서』 「사도행전」의 묘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7:22):

 

“모세는 이집트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 하는 말과 하는 일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집트는 기후가 온난하고 외침이 적었기 때문에 높은 농업 생산성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독창적인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문명 초기부터 꾸준히 축적된 지식은 당시 지식인 계층에 속한 서기관과 신관들을 통해 수천 년에 걸쳐 전승되고 기록되면서 그 외연과 깊이를 점진적으로 확장해나갔으며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1069년)부터는 외부세계와의 활발한 접촉을 통해 천문학과 같은 새로운 학문이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순수 학문으로서의 철학 수학 과학 의학 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지식은 실재적인 목적, 즉 측량이나 예측 혹은 질병 치료 등을 달성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따라서 개별적인 현상에서 보편적인 법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 등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집트인들의 “대증적”(對症的) 태도는 의학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의술은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의학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집트 역사 내내 의술과 주술이 완전히 분리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고대 문명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도 눈으로 바로 확인이 가능한 외상이나 골절을 제외한 내과적 질환은 더럽고 사악한 망령(亡靈)이 사람의 몸 속에 들어와 몸의 조화를 무너뜨림으로써 발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는 이런 악령을 몸 밖으로 쫓아내기 위한 주술요법과 환자의 증상을 개선시키기 위한 (비교적 과학적인) 의료요법이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전문 주술사가 수행하는 주술요법에는 환자를 보호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던 호부(護符: amulet)를 환자 몸에 놓아두거나, 영혼을 쫓아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우호적인 신들을 호출하거나, 몸 속 영혼을 위협하는 구마(驅魔) 주문을 낭송하거나, 동종주술 혹은 감염주술에 기반한 민간요법 등을 시술하는 방법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주술사와는 구분되는, 오늘날의 의사와 유사한 전문적인 직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왕국시대 제3 왕조(기원전 2686-2613년)무렵입니다.

 

약 2000년 뒤인 기원전 5세기경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 역사 저술가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전 484-425년)는 이집트에는 의사들이 넘쳐나며 그들은 모두 외과나 부인과와 같이 자신의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역사』 II.84):

 

“의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모든 의사는 여러 가지 질환을 보지 않고 특정한 질환만 본다. 그래서 어디나 의사가 넘쳐난다. 눈을 보는 의사, 머리를 보는 의사, 치아를 보는 의사, 배를 보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속병을 보는 의사도 있다.”

 

그런데 이런 “전문의”가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한 후기왕조 시대(기원전 664-332년) 이전에도 존재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집트 의학 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은 분명한데 여러 문헌자료를 통해 이집트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의학지식과 시술경험은 고대 서아시아뿐만 아니라 지중해 전역에서도 높은 명성을 누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호메로스(Homer: 기원전 750년경 활동)가 『오디세이아』(Odyssey)에서 “아이귑토스,” 즉 이집트를 묘사한 부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IV.229-232):

 

“그곳[아이귑토스]에서는 곡식을 가져다 주는 대지가 수많은 약초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서로 섞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또 각자가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의사였는데 그들은 파이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호메로스는 이집트에서는 모든 사람이 뛰어난 의사이며 “파이온”(Paean)의 자손이라고 언급하는데 『일리아스』(Iliad) 5권 401행, 899행, 900행에 따르면 파이온은 하데스(Hades)와 아레스(Ares)를 치료하는 신들의 의사였으며 의학과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의 별칭이기도 했습니다. 


이집트 의학의 우수성을 인지한 것은 비단 그리스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서아시아 전역의 제국이나 보호국을 가릴 것 없이 이집트 의학에 대해서는 모두 상당한 경의를 표했으며 자국에서 치료할 수 없는 질환이 발생할 경우 이집트에서 의사를 초빙하거나 이집트의 의학지식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리스 지배기(기원전 323-30년)에 지중해 전역으로 전파된 이집트 의학에 기반한 서양의학의 기본 골격은 이후 로마시대(기원전 30년-기원후 395년)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14-16세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존속되었습니다.


고대 서아시아에 위치한 이집트 주변 국가들은 외교서신을 통해 자신들의 주치의가 치료할 수 없는 난치병을 치료해줄 수 있는 의사나 (영험한) 신상을 자국으로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파라오에게 하곤 했는데 이런 요청은 이 지역에서 중요한 외교관례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Anatolia) 평원에서 발흥한 히타이트(Hittite) 왕 하투실리 3세(Hattusili III: 기원전 1267-1237년)는 신왕국시대 제19 왕조 람세스 2세(Ramesses II: 기원전 1279-1213년)에게 불임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손위 누이인 마타나지(Matanazi)를 위해 이집트 의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람세스 2세는 하투실리 3세에게 자신의 본심을 숨기지 않은 다소 무례한 어투의 답신을 보냈습니다(Bo 652/f + 28/n + 127/r, obv. 8-rev. 8):

 

“보시게, 그대[하투실리 3세]의 형제인 나[람세스 2세]는 내 형제의 누이인 마타나지를 알고 있네. 50세라니! 절대 아니네! 그녀는 60세네! 보시게, 50세의 여인이라니, 60세는 말할 것도 없네! 그 누구도 그녀가 회임할 수 있는 약제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네. 혹여 (이집트의) 태양신과 (히타이트의) 풍우신께서 하명(下命)하시고 그들께서 내리신 명령이 내 형제의 누이를 위해 이행된다면 (또 모를 일이네만). 아무튼 왕이자 그대의 형제인 나는, 그녀가 회임할 수도 있으니 우수한 독경신관(讀經司祭: lector priest =주술사)과 전문의를 보내도록 하겠네.” 


하투실리 3세가 이런 모욕에 가까운 회신을 받으면서까지 람세스 2세에게 이집트의 뛰어난 의료자원을 요청한 이유는 마타나지가 히타이트 제국의 핵심부인 아나톨리아 서부를 다스리는 보호국의 왕 마스투리(Masturi)의 왕비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마스투리는 히타이트에 충성을 맹세했으나 나이가 많았고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하투실리 3세로서는 마스투리 이후 왕위가 히타이트에 적대적인 세력에게 넘어갈 경우 –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 서부 지역의 정세가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따라서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실, 하투실리 3세도 누이인 마타나지가 가임기를 훨씬 지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집트에 의료진을 파견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 것은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하투실리 3세는 이전에도 이집트로부터 의사를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람세스 2세 치세 초기인 기원전 1275년 무와탈리 2세(Muwatalli II: 기원전 1295-1272년)와 카데쉬 전투(Battle of Qadesh)를 치른 지 16년 뒤인 기원전 1259년 당시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하투실리 3세 주도 하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하투실리 3세를 괴롭히던 만성적인 눈병이 재발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람세스 2세는 눈병에 효과가 있는 이집트 약재를 지체 없이 히타이트로 보내는 조치를 취했습니다(KUB III 51, rev. 1-10):

 

“내[람세스 2세]가 전차병 한 명을 피리나와(Pirihnawa)와 함께 가게 조치했으며 그 전차병이 나의 전령 피리나와와 함께 아무루(Amurru)의 왕 벤테시나(Benteshina)에게 갔네. 그가 벤테시나에게 그가 가져간 모든 약재를 주었고 벤테시나는 그대의 형제인 왕[람세스 2세]이 피리나와를 통해 그대에게 지급(至急)으로 보내도록 조치한 약제를 사르구-관리(sargu-officer)를 시켜 나의 형제[하투실리 3세]에게 파견하였네.”

 

람세스 2세가 하투실리 3세에게 보낸 약제는 정말로 효능을 발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하투실리 3세는 람세스 2세에게 더 많은 약재를 요청했고 람세스 2세는 하투실리 3세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외교적 의료지원은 하투실리 3세의 아들 툿할리야 4세(Tudhaliya IV: 기원전 1237-1209년 재위) 치세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툿할리야 4세는 아나톨리아 남부에 위치한 히타이트 요충지 타르훈타싸(Tarhuntassa) 총독인 사촌 쿠룬타(Kurunta)의 질병을 치료해줄 의사를 보내줄 것을 람세스 2세에게 요청했습니다.

 

히타이트 궁정 소속 의사 두 명이 쿠룬타를 위한 약재를 조제했으나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람세스 2세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습니다(KUB iii 67, obv. 12-rev. 12):

 

“보시게, 내[람세스 2세]가 서기관이자 의사인 파리아마후(Pariamahu)를 파견했네. 그는 타르훈타싸의 왕 쿠룬타를 위한 약재를 조제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그대가 서신에서 언급한 모든 종류의 약재를 배분할 것이네. 그가 그대[툿할리야 4세]에게로 가면 그가 타르훈타싸의 왕 쿠룬타를 돌보게 하여 그를 위한 약제를 조제할 수 있도록 조치하시게. 그리고 쿠룬타와 같이 있는 의사 2명에게 명하여 이집트로 오게 하시게. 서기관이자 의사인 파리아마후가 그[쿠룬타]에게 도착하는 그날로 그 두 명의 의사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중단해야 할 것이네. 보시게, 나는 그대가 한 말을 잘 이해하고 있네. 지금 서기관이자 의사인 파리아마후는 여정에 올랐고 그대가 서신에서 언급한 모든 종류의 약제를 조제할 것이네.”


이처럼 상호 국제적인 교류가 있던 국가에 의료진과 의약품을 지원하는 것은 당시 고대 중근동의 외교관례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례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미탄니(Mitanni) 바빌로니아(Babylonia) 아시리아(Assyria) 등과 같은 강대국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산재한 이집트 보호국과 패권국이었던 이집트 사이에서도 행해졌습니다.

 

일례로, 이집트 보호국 중 하나였던 우가리트(Ugarit)의 왕 니킴아다 2세(Niqm-Adda II: 기원전 1350-1315년경)가 신왕국 시대 제18 왕조의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Amenhotep IV/Akhenaten: 기원전 1352-1336년)에게 보낸 서신에서 니킴아다 2세는 이집트 의사를 우가리트로 파견해줄 것을 파라오에게 간청합니다(「아마르나 외교서신」 EA 49 = C 4783 (12238) 1-26):

 

“이전에 제 아비의 거처에 [폐하(?)께서 ......을/를 하사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이번에) 저[니킴아다 2세]의 주께서는 쿠쉬(Kush) 출신 시복(侍僕) 2명과 궁인 1명을 파견하여 주시옵소서. 아울러 궁인 중에서 의사도 1명 보내주시옵소서. 이곳에는 의사가 없사옵니다. [하]가마싸(Khagamassa)에게 하문하시옵소서. 더불어, 이와 같이 문안[선물 ... ...과 100 ... ...]을/를 진상 드리옵니다.” [여기서 “[하]가마싸에게 하문하”라는 것은 니킴아다 2세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를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파견한 혹은 이집트에서 고용한 감독관에게 확인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외교서신에서 현지에 의사가 없다는 니킴아다 2세의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이집트의 전문의들만큼 실력 있는 의사가 없다는 호소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아무튼 파라오의 호의로 외국에 파견된 의사들은 일정기간 동안 현지에 머물면서 특정 질환을 치료하거나 현지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전반적인 의료자문을 제공하고 전문지식을 전수하는 것과 같은 활동을 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 각지로 파견된 이집트 의사는 의료활동을 통해 혹은 전문지식의 전수를 통해 의료부문에서의 이집트의 명성과 영향력을 지속적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의사들이 파견된 지역에 한시적으로 머물렀다는 것은 당시 바빌로니아의 왕 카다쉬만-엔릴 2세(Kadashman-Enlil II: 기원전 1263-1255년 재위)가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 2세와 하투실리 3세를 위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Hattusa)로 파견한 의사 2명이 양국의 합의한 기간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외교서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인용문이 많아 글이 너무 많이 길어졌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고대 이집트 의학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의학 파피루스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의학 #람세스2세 #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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