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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11] 고대 이집트의 필기 매체

by taeshik.kim 2023.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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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환 이집트학 박사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유물 소개 011]
고대 이집트의 필기 매체 – 서기관의 3종 신기와 파피루스


기원전 3000년경 출현한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聖刻文字: hieroglyph)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기되었는데 수평으로 쓸 때에는 오른쪽에서 왼쪽,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이 모두 가능했으며 수직으로, 즉 위에서 아래로 쓸 때에도 그 방향을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향하게 묘사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상형문자는 그림문자로 출발했기 때문에 문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 상형성 때문에 문자가 아닌 다른 도상(圖像)과도 조화롭게 어울렸으며 가상의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에 단정하게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매력에 힘입어 이집트 역사 초기부터 영구적으로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 텍스트를 신전 왕묘와 같은 건축물 벽면이나 석비의 표면 등에 기록하는 데 광범위하게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상형문자는 대개 표면이 단단한 석재 목재 금속 등에 새겨지거나 프레스코(fresco) 화법과 같이 즉 새로 바른 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려졌는데 문자를 새기는 데에는 석공의 끌이, 회벽에 그려질 때에는 화가의 붓이 기록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울러 상형문자로부터 다양한 글자체가 분화했는데 이들 글자체는 정자체에서 문자를 얼마나 흘려 썼느냐에 따라, 그리고 사용된 시기와 이집트어의 발전단계에 따라 상형문자 흘림체(cursive hieroglyph) 신관문자(神官文字: hieratic) 민용문자(民用文字: demotic) 등으로 구분됩니다.

 

여기서 상형문자와 거의 동시대에 출현한 상형문자 흘림체와 신관문자는 파피루스와 같이 비교적 매끄러운 표면에 펜으로 문자를 빠르게 기입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때 사용한 필기도구는 갈대를 비롯한 식물 줄기로 만든 가는 펜과 팔레트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팔레트에는 통상 두 개의 둥근 구멍이 파여 있는데 한쪽은 검은색 잉크 덩어리로, 다른 한쪽은 붉은색 잉크 덩어리로 채워졌습니다.

 

이를 통해 이집트의 서기관들이 문서를 작성할 때 두 가지 색깔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붉은색 잉크는 각 장(章) 혹은 문단 제목이나 각주를 표시하는데, 검은색 잉크는 본문을 작성하는 데 각각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고체 형태 잉크는 소량의 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려 녹였는데 잉크를 녹이기 위해 서기관들은 팔레트와 함께 물통을 지참했습니다.

 

이처럼 서기관이 무언가를 쓸 때에는 기본적으로 팔레트, 붓과 붓을 보관할 수 있는 붓통, 그리고 물통이 필요했습니다.

 

“서기관의 3종 신기”(神器)로 물릴 만한 팔레트-붓통-물통을 묘사한 상형문자는 그 자체로 “서기관의 도구”와 함께 “서기관”과 “문서”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문명에서 문자와 그것을 구사할 수 있었던 서기관의 위상을 고려할 때 왕묘나 귀족의 분묘에서 휴대하기 편하게 끈으로 서로 묶인 팔레트-붓통-물통으로 구성된 필기도구가 묘사된 장면이나 분묘의 주인이 내세에 사용할 수 있도록 부장(副葬)된 실제 필기도구가 자주 발견된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분묘의 벽화나 부조에서 귀족들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할 수 있는 홀(笏: scepter)이나 권장(權杖: staff)과 같은 지물(持物: attribute) 이외에도 서기관의 필기도구를 손에 쥐거나 어깨에 멘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고왕국 시대 제3 왕조의 조세르(Djoser: 기원전 2667-2648년)와 세켐케트(Sekhemkhet: 기원전 2648-2640년) 치세에 고위관리를 지낸 헤시레(Hesyre)의 목판 저부조를 들 수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수도 멤피스(Memphis) 서안(西岸)에 위치한 공동묘역 사카라(Saqqara) 분묘에서 발견된 다수 목판 부조에는 헤시레의 청년 장년 중년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 목판에서 헤시레는 예외 없이 다른 지물과 함께 서기관의 필기도구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아래 그림 참조].

 

 

고대 이집트 역사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비중은 전체 인구의 10%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당시 서기관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편, 가장 일반적인 기록매체였던 파피루스(papyrus)는 이집트 강변에 자생하던 사초(莎草: carex = sedge) 중 하나인 종이방동사니, 즉 파피루스(학명: Cyperus papyrus) 줄기를 채취하여 물에 불린 후 겉껍질을 벗겨내고 남은 안쪽의 부드러운 심을 얇게 찢어 가로 세로로 번갈아 가며 압착하여 만들었습니다.

 

분량이 많은 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사각형 파피루스 낱장을 가로로 이어 붙여 두루마리(scroll)를 제작했습니다.

 

이런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이집트학에서는 한 권의 “책”(book)으로 간주합니다.

 

파피루스는 점토판이나 양피지에 비해서는 내구성은 떨어졌으나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고 만드는 방법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기록매체에 비해 가볍고 휴대하기 편했기 때문에 이집트 역사 초기부터 가장 일반적인 기록매체로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습니다.

 

파피루스의 주요 생산국으로서 이집트는 지중해 전역에 파피루스를 수출했는데 이때 파피루스 중간 집산지 역할을 한 곳이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북부 해안에 위치한 페니키아(Phoenicia) 무역도시 비블로스(Byblos)였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국제무역은 왕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피루스는 이집트어로 pA-pr-aA “파페르아아”(pa-per-a’a), 즉 “파라오의 소유물”로 불렸는데 여기서 “파피루스”라는 단어와, 영어의 “paper” 프랑스어의 “papier” 독일어의 “Papier” 스페인어의 “papel” 등이 함게 파생되었습니다.

 

또한 고대 바빌로니아어(Babylonian)인 아카드어(Akkadian)로 “구블라”(Gubla)로 불린 지명이 그리스어로는 “뷔블로스”로 불리면서 영어의 Bible “바이블” = “성경”이나 독일어의 Bubliothek “비블리오텍” = “도서(관)” 같은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파피루스 이외에도 아마포(린넨)이나 양피지 등이 기록매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만 매우 제한적인 경우로 한정되었습니다. 

 

아마포의 경우, 장식을 목적으로 그림과 문자를 같이 그려 넣거나 미라를 감쌀 때 시신을 보호해준다고 여겨진 주문을 적어 넣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양피지의 경우 내구성이 뛰어나긴 했습니다만 재료가 귀하고 제작과정이 복잡하여 공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가격도 높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점토판에 상형문자가 쓰인 경우도 드물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와 같이 일반적인 기록매체로서가 아니라 석비와 같이 비싼 재료를 구할 수 없던 사람들에게 대체제로서 선택된 것입니다.

 

또한 이집트인들에게는 특별한 사안에 대하여 망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는 망자에게 제공된 봉헌물을 담는 토기 바닥에 문자가 기입되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금속 표면에 문자가 새겨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이집트가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발흥한 히타이트(Hittite) 제국과 체결한, 세계 최초 강대국 간 『평화협정』(Egyptian-Hittite Peace Treaty)을 들 수 있습니다.

 

신왕국시대 제19 왕조 람세스 2세(Ramesses II 기원전 1279-1213년)는 치세 초기인 기원전 1275년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Muwatalli II: 기원전 1295-1272년)와 카데쉬 전투(Battle of Qadesh)를 치른 후 기원전 1259년 하투실리 3세(Hattusili III: 기원전 1267-1237년) 주도 하에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이때 양국의 평화협정 전문이 이집트어와 당시 국제 공용어(lingua franca)였던 아카드어로 은판(銀板)에 새겨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기록매체는 토기 조각인 도편(陶片) 혹은 작은 석회암 조각인 석편(石片)을 의미하는 오스트라콘(ostracon)입니다. 

 

고대 이집트 서기관들이 무언가를 간단하게 메모하거나 한번 읽고 버릴 짧은 서신 같은 문서를 쓸 때, 학생들이 서기관 양성소에서 필사 연습을 하거나 집에서 숙제를 할 때, 그리고 화가들이 연습용 습작을 그릴 때 파손되어 더 이상 사용될 수 없는 토기 조각이나 이집트 전역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편평한 석회암 조각의 표면에 문자를 쓰거나 형상을 그려 넣었는데 이렇게 기록된 텍스트와 도상(圖像: iconography)은 여러 도시와 촌락의 쓰레기 터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오스트라콘이 가장 값싼 기록매체로 다양한 계층에 걸쳐 두루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고대이집트 #팔레트 #파피루스 #오스트라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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