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회차에서는 『로제타 석비』(Rosetta Stone)가 어떻게 발견되고 또 영국으로 옮겨졌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석비는 원래 무슨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요?
『로제타 석비』는 그리스 지배기에 이집트를 다스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Ptolemy V Epiphanes: 기원전 205-180년)가 기원전 196년 멤피스(Memphis)에서 반포한 왕실 포고문입니다.
1799년 발견될 당시 석비 중 절반 이상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는데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 상단에는 14행 분량의 이집트 상형문자 텍스트가, 중간에는 32행 분량의 민용문자(民用文字: Demotic) 텍스트가, 그리고 맨 아랫단에는 54행 분량의 그리스어 텍스트가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로제타 석비』가 온전했다면 고대 이집트의 전형적인 석비 양식에 따라 석비 상단은 초승달 모양의 반원 형태(lunette)로 제작되었을 것이며 그 아래에는 매의 날개가 달린 태양원반(solar disc)과 함께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도열한 신들의 형상이 새겨졌을 것입니다[아래 관련 기사 참조].
또한 『로제타 석비』와 크기 및 구도가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 1세(Ptolemy III Euergetes I: 기원전 246-221년)가 기원전 238년 반포한 『카노푸스 포고문』(Canopus Decree)이 새겨진 석비와 비교했을 때 『로제타 석비』의 원래 높이는 약 149센티미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파괴된 석비의 경우, 높이는 112.3센티미터, 너비는 75.7센티미터, 두께는 28.4센티미터입니다.
석비 앞면은 매끄럽게 마감되었으며 텍스트는 매우 얇은 깊이로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옆면은 일직선으로 단정하게 연마되어 있으나 뒷면은 거의 가공되지 않은 거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로제타 석비』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 치세 초기의 불안정한 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부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Ptolemy IV Philopator: 기원전 221-205년) 치세 말기 이집트 남부에서는 그리스-마케도니아 왕조(Greco-Macedonian Dynasty)의 실정(失政)과 이방의 지배자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감 등으로 인해 토착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는데 이 반란은 기원전 186년까지도 진압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205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40대 초반 나이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당시 6살이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아무런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누이이자 아내, 즉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어머니였던 아르시오네(Arsione) – 당시 그리스-마케도니아 왕조의 왕녀들은 대개 아르시오네·베레니케(Berenice)·클레오파트라(Cleopatra) 중 하나를 이름으로 썼습니다 – 가 가신들에 의해 독살당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원전 200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고 있던 또 다른 그리스-마케도니아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Dynasty)의 안티오코스 3세 대왕(Antiochus III the Great: 기원전 222-187년경)이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을 틈타 이집트를 재차 침공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국내외 이집트의 정세는 주변 국가의 빈번한 침략과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엄중한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198년경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안티오코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Cleopatra I)와 결혼함으로써 같은 뿌리를 가진 – 이들 두 왕조의 시조는 모두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er III: 기원전 336-323년) 휘하의 장군들이었습니다 –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간 불화는 일단 봉합되고 불안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로제타 석비』는 바로 이런 내우외환 위기 속에서 반포된 왕실 포고령을 담고 있습니다. [그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지배를 받던 유대 지역은 이때부터 셀레우코스 왕조 지배를 받게 됩니다.]
어머니의 독살과 셀레우코스 왕조의 침공과 같은 어수선한 정국에 재위 8년차까지 대관식을 하지 못한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14살이 되는 기원전 196년 11월 마침내 대관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이 대관식을 계기로 신전들에 토지를 하사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신관계급을 통해 국내의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대관식은 기원전 3000년경 수립된 초기왕조 시대(기원전 3000-2686년)부터 이집트의 전통적인 수도였던 북부 멤피스(Memphis)에서 거행되었으며 멤피스 주신(主神)인 프타(Ptah)의 대신관 하르마키스(Harmachis)에 의해 집전(執典)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집트 전역에 산재한 신전으로부터 파견된 사절단을 비롯하여 『로제타 석비』의 민용문자 텍스트 4-5행에 언급된 다양한 계급의 신관들이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관식에 이어 소위 “멤피스 포고문”(Memphis Decree)으로 명명된 왕실 포고문이 반포되었는데 여기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왕이 신전들에 토지를 하사하고 세금을 감면해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전국의 1급·2급·3급 신전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위한 신전의례를 엄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포고문에는 또한 상형문자 민용문자 그리스 알파벳 3개 서로 다른 문자로 작성된 텍스트를 석비에 새긴 후 신전 지성소에 안치된 왕의 신상(神像) 근처에 세워놓아야 한다는 왕명(王命)도 포함되었는데 『로제타 석비』가 바로 그런 석비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현재 『로제타 석비』 이외에도 “멤피스 포고문”이 새겨진 석비는 3개 정도가 더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 북부 삼각주 지대에 위치한 다만후르(Damanhur) 인근 엘-노바이라(el-Nobaira)에서 발견된 석비에는 상형문자 텍스트만이 조악한 상태로 새겨져 있는데 이 석비가 제작된 날짜는 『로제타 석비』보다 무려 14년이나 늦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치세 23년, 즉 기원전 183년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왕에 대한 신전의례가 전국적으로 동시에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1779년 『로제타 석비』가 발견되고, 1809년부터 『이집트지誌』(Description de l’Égypte) 시리즈가 출간되기 시작하면서 – 시리즈가 완결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829년이었습니다 – 유럽 전역에서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고대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유럽 각국의 언어학자들은 경쟁적으로 성각문자 해독에 매달렸습니다.
이제 이집트 상형문자 체계 해독은 단순한 학문적인 성취를 넘어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유럽 학자들 간 치열한 학문적 대결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1822년 프랑스 젊은 언어학자 장-프랑수와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년)이 마침내 성각문자의 기본적인 체계를 밝혀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394년 8월 24일 마지막 상형문자 텍스트가, 그리고 452년 12월 11일 마지막 민용문자 텍스트가 각각 새겨진 후 완전히 잊혀진 이들 문자체계를 다시 복원하는 데 『로제타 석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두말 할 필요 없이, 유사한 –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은 – 내용의 텍스트가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한 텍스트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면 거기에 근거하여 다른 텍스트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냄으로써 해당 문자체계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래 상형문자 텍스트에서와 같이 실제로 마지막 14행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본 포고문은 단단한 돌로 제작된 석비에 신성문자 민용문자 그리스 문자로 새겨질 것이며 모든 1급 2급 3급 신전의 지성소에 안치된, 상하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 영생하소서, 프타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 현현하신 신, 완벽의 주의 신상 옆에 세워질 것이다.” [상형문자 텍스트의 nṯr pr “현현하신 신”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호칭인 “에피파네스”를 이집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한편, 여기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텍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그리스 알파벳 텍스트 53-54행):
[ΤΟ ΔΕ ΨΗΦΙΣΜΑ ΤΟYTO ANAΓΡAΨAI EIΣ ΣTHΛAΣ Σ]TEPEOY ΛIΘOY TOIΣ TE IEPOIΣ KAI EΓXΩPIOIΣ KAI EΛΛHNIKOIΣ ΓPAMMAΣIN, KAI ΣTHΣAI EN EKAΣTΩI TΩN TE ΠPΩTΩN KAI ΔEYTEPΩN [KAI TPITΩN IEPΩN ΠPOΣ THI TOY AIΩNOBIOY BAΣIΛEΩΣ EIKONI] “그리고 본 포고문은 단단한 돌로 제작된 석비에 신성문자 • 토착문자 • 그리스 문자로 새겨질 것이며 모든 1급 • 2급 • 3급 신전 안의 영생하는 왕의 형상 부근에 세워질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석비의 서로 다른 텍스트들이 서로 다른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신들의 언어”(divine speech)를 구현한 상형문자 텍스트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영원히 축복할 이집트의 신들 – 그리고 그들을 모시는 신관들 – 을 위해, 민용문자 텍스트는 피지배 계층인 이집트 현지인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공문서에 반드시 표기되어야 할 공용어인 그리스어 텍스트는 그리스 지배자들을 위해 각각 사용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그리스인들”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그리스어 텍스트에서는 이 단어가 ΕΛΛΗΝΙΚΟΙΣ “엘레니코이스”로 표현된 반면, 상형문자 텍스트에서는 ḥAw-nbw “하우-네부”로, 민용문자에서는 wynn “위넨”으로 각각 표기되었는데 “하우-네부”는 “섬사람들,” 즉 “에게 해 사람들”(Aegeans)이라는 의미이며 “위넨”은 “이오니아인들”(Ionians)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각각의 텍스트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텍스트 사이의 일대일 대응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제타 석비』가 성각문자 체계의 해독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초기의 학자들은 텍스트 간의 체계적인 비교작업 단계에서부터 상당한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각문자 해독의 역사에서 『로제타 석비』의 역할은 여전히 핵심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문자 해독의 역사에서 석비가 차지한 이러한 상징적 지위 덕분에 『로제타 석비』는 “미지의 무언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다양한 상황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한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한국에서도 제법 유명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1961년-현재)의 1991년 대표작 『개미』(Les Fourmis) 3부작에서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에드몽 웰즈(Edmond Wells)가 개미들이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페로몬을 크로마토그래피(chromatography)로 분석하여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기기에 "로제타 석비"라는 명칭을 붙인 것과,
2004년 3월 2일 유럽 우주국(ESA: European Space Agency)이 67P/추류모프-게라시멘코(67P/Churyumov-Gerasimenko) 혜성을 향해 발사한 혜성 탐사선에 “로제타”(Rosetta)라는 이름을,
그리고 이 탐사 프로젝트에는 “로제타 미션”(Rosetta Miss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데
유럽 우주국은 고대 이집트 문자의 비밀이 『로제타 석비』를 통해 풀린 것처럼 혜성의 기원과 성분을 분석함으로써 태양계와 우주의 비밀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이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끝으로, 약 24개 언어를 대상으로 외국어 학습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한 유명한 미국 기업이 상호로 "로제타스톤"을 선택했다는 사실 역시 일상에서 『로제타 석비』의 상징성을 다시 한번 환기 시켜주는 사례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한편, 자국 언어학자가 상형문자 해독이라는 과업을 이루어냈지만 정작 그 열쇠가 된 『로제타 석비』는 영국에게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은 프랑스는 1991년 샹폴리옹의 출생지인 피작(Figeac)에 위치한 샹폴리옹 세계문자박물관(Musée Champollion des Ecritures du Monde) 앞마당 바닥에 세계에서 가장 큰 『로제타 석비』 복제본을 설치하여 아쉬움을 달랬습니다[아래 관련 링크 (1) 참조].
반면, 석비를 소장한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은 배지·냉장고 마그넷(fridge magnet) · 기념주화 · 마스크 · 랜야드(lanyard) · 마우스패드 · 머그컵 · 지갑 · 넥타이 · 티셔츠 · 양말 · 시계 · 열쇠고리 · 우산 · 책갈피 · 연필 · 공책 · 에코백 · 백팩 등 『로제타 석비』를 테마로 한 수많은 기념품을 제작하여 판매함으로써 자신들이 소장한 석비의 존재감을 유감 없이 과시하고 있습니다[아래 관련 링크 (2) 참조].
영국의 이집트학자 존 레이(John Ray: 1945년-현재)는, “언젠가 『로제타 석비』가 로제타에서 머물렀던 것보다 영국박물관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이런 "희망" 섞인 전망이 『로제타 석비』를 향한 영국인들의 솔직한 속내를 가감 없이 대변하는 것 아닐까요?
*앞선 회차에서 유럽의 두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가 1799년에서 1801년에 걸쳐 『로제타 석비』를 두고 실랑이를 벌일 때 정작 당사국인 이집트는 이들의 다툼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독의 아이콘”(icon of decipherment)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자유물이 되어 버린 『로제타 석비』에 대해 오늘날의 이집트 정부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집트가 『로제타 석비』에 대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초반부터였습니다.
2003년 7월 당시 이집트 고고학청장(Secretary-General of the Supreme Council of Antiquities)이었던 자히 하와스(Zahi Hawass: 1947년-현재)는 『로제타 석비』를 이집트에 반환할 것을 영국 측에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이어 2005년 파리에서는 석비가 베를린 박물관(Neues Museum)이 소장하고 있는 “네페르티티 흉상”(Nefertiti Bust)과 함께 반드시 반환되어야 할 이집트의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영국박물관은 2005년 유리섬유로 제작한 실물 크기 복제 석비를 이집트에 제공했습니다만 이에 만족할 리 없었던 하와스 전 고고학청장은 2009년 12월 만일 영국이 당시 2013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그랜드 이집트 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 개관에 맞춰 『로제타 석비』를 3개월 간 대여해준다면 영구반환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집트와 함께 그리스 역시 앞서 언급된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를 반환해 줄 것을 각국의 박물관에 끈질기게 요청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당사국들의 반발에 위기감을 느낀 전세계 국립박물관 30개소 – 여기에는 영국박물관 · 루브르박물관(Musée du Louvre) ·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museum)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는 앞선 시기에 취득한 유물에 대해서는 현대의 기준이 아니라 "당시의 감수성과 가치관"이 반영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한 국가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민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라는 취지의 공동 선언문을 2002년 발표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을 고려할 때 1822년 상형문자 체계의 해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함으로써 현대 이집트학의 초석 역할을 했던 『로제타 석비』가 고국으로 반환될 전망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요원해 보입니다.
관련 기사:
https://blog.britishmuseum.org/everything-you-ever.../...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로제타석비 #프톨레마이오스5세 #샹폴리옹 #영국박물관 #로제타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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