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이 일으킨 요遼 왕조를 볼 적에 중국이나 한국 역대 왕조와 대비해 유별난 대목 중 하나가 황후 혹은 태후의 국정 참여가 두드러진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단순히 내조 혹은 조언을 넘어 때로는 무기를 직접 잡고 전쟁을 지휘하는가 하면, 수렴청정도 보통 왕비 엄마는 이름만 내세울 뿐 원로대신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것과는 아주 달라서 직접 처결한다.
이는 유목민 전통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빠짐없이 유목국가의 그것을 조사한 것은 아니어서 자신은 없다.
요나라 역사를 정리한 요사遼史 권63 열전 제1 후비后妃 전에 이르기를
요遼나라는 돌궐突厥을 따라서 황후皇后를 일컬어 가돈可敦이라 했지만, 거란 말로는 특리건忒俚塞이라 불렀으며, 존쟁할 적에는 누알마褥斡麼라 했으니 이는 거개 황후를 후토后土에 비겨서 그를 어머니로 여겨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태조(야율아보기)가 황제라 칭하면서 할머니를 높여 태황태후太皇太后라 하고, 어머니는 황태후皇太后라 하면서 부인은 황후皇后라고 칭했다.
고 했다.
저 중에서 할머니를 태황태후太皇太后라 높이고 운운한 이하 대목은 전형적인 중국 제도라 하등 독특한 점은 없고, 그 앞 대목이 거란의 전통을 유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황후가 직접 국정을 적극 주관하는 전통은 이 태조 야율아보기 시대 그의 순흠황후淳欽皇后 술률씨述律氏에서 확고히 보이는데, 저 열전을 보면 그는 간중과단簡重果斷하고 웅략雄略이 있었다고 한다.
과단果斷이야 과단성이 있는 요즘 일상어도 있으니 새삼 설명이 필요없을 테고, 간중簡重은 일처리가 간결하면서도 무게감 있었다 이 정도 뜻일 것이다.
남편 야율아보기가 즉위하면서 지황후地皇后로 추대된 그는 신책神冊 원년(916)에는 다시 존호가 더해져 응천대명지황후應天大明地皇后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런 그를 일러 저 열전은 "(황제가) 군사를 일으키고 군중을 동원할 때는 항상 모의에 참여했다"고 하면서 그러한 일화들을 덧붙이거니와
첫째, 야율아보기가 사막을 건너 당항黨項과 황두黃頭, 그리고 취박臭泊의 두 실위室韋가 허점을 뚫고서 습격해 오자 황후가 이를 알고서 군사를 내어 기다렸다가 분발하여 쳐서 그들을 크게 깨뜨리니 그 명성이 여러 이웃 국가들에 떨쳤다 한다. 이를 보면 황후가 직접 군사를 지휘했다.
둘째, 유주幽州의 유수광劉守光이 사절로 보낸 한연휘韓延徽가 구원을 요청하면서도 황제한테 절을 하지 않자 태조가 분노해 그를 억류하고는 말 먹이는 일을 시키자, 황후가 이 모습을 보고서는 신하가 지조를 지키고 굴복하지 않는 것은 현자라 할 만 한데 어찌 저리 하느냐고 해서 한연휘를 크게 썼다고 한다.
셋째, 오吳 군주 이변李嚈이 아마도 석유로 생각되는 맹화유猛火油를 바쳤지만 그에다가 물을 부었다가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자, 이에 놀란 태조가 자신을 기망했다면서 삼만 기병을 동원해 유주를 공격하려 하자 황후가 어찌 이런 하잖은 일로 공격에 나서느냐 조리있게 설득해서 그만두게 했다고 한다.
넷째, 태조가 발해를 멸할 때도 그 모의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여성은 성격이 아주 맹렬했던 듯, 야율아보기가 죽자 따라 죽으려 했지만, 친척들과 신하들이 극력으로 말리자 오른 팔을 끊어 관속에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남편의 죽음과 더불어 그는 칭제하며 군대와 나라 일을 직접 주관했다.
야율아보기가 첫째 아들 야율배耶律倍가 아닌 둘째 아들 야율비광耶律備光한테 황위를 물려주었지만, 이것이 황후의 뜻과도 맞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첫째나 둘째보다 막내아들 야율이호耶律李胡를 시종 매우 총애한 듯, 태종이 죽자 이 막내아들을 황제로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장남으로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나 중국으로 도망간 맏아들 야율배耶律倍의 아들 야율완耶律阮이 진양鎮陽에서 즉위하자(아마 탈취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자기 손자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희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이미 이때는 태후가 된 그는 아마도 막내아들한테 황제 자리에 오를 권위를 주고 싶었던지 야율이호를 시켜 야율완을 토벌토록 한다.
하지만 이 황위계승 전쟁에서 야율이호가 패하자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일으켜 손자를 토벌하려 나섰지만 혈육간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 간언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아마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군사를 해산케 하고는 그 자신은 조주祖州라는 곳으로 물러나니, 이것이 실상 강요된 정계 은퇴였다. 그곳에서 응력應歷 3년(953), 74세로 붕서했다.
이 전통이 두고두고 이어지니 거란은 치맛바람이 거센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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