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희..이병철 장남, 이건희 큰형.
1931년생
6.25 발발 때 스무살...징집대상
이를 피해 그는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자서전에서 썼다. 밀항의 역사..이것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한다. 이 무렵에 대규모 밀항이 이뤄지게 되거니와 내가 아는 문화계 저명인사 중에도 제법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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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경상도 지역 인사들이 대규모로 밀항을 감행한다.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군대였다. 화가 이우환이 대표적이다. 그 역시 징집을 피해 서울대에 다니다가 도망쳤다.
자서전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그 자체 그 시대의 박물관임을 엿볼 수 있다. 경상도 지역 인사들이 많은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일본과의 지리적 인접성이었다.
밀항을 위해서는 교통로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 교통로는 제국주의 식민지가 가져다 준 축복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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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포스팅에 이제는 고인이 된 안병헌 선생이 아래와 같은 논급을 보탰다.
일제시대 '학력=징병'은 아닙니다. 학병은 반강제적 모병에 의한 것.....최남선, 이광수 등이 학생들 군대 가라고 토쿄에 가서 선무했다가 매국노 취급받죠. 학병 참전 권유의 시문 등을 남긴 문인들 또한 마찬가지~~ 요즘 우리나라 국민 개병제와 같은 강제징병은 일제 시대에 딱 한 번 있었습니다. 1944년 학력 관계 없이 신체검사와 함께 군대에 바로 소집된 1924년 갑자생. 이들은 1944년 겨울부터 1945년 종전까지 무조건 일본군인이 되어 만주로, 보르네오로 끌려갔습니다. 좀 형편되는 사람들은 여자 천 명이 한 땀씩 바느질한 훈도시를 차고서....'울지마라 갑자생'은 여기에 연유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전사하면 손톱발톱 담긴 흰 당쉐기(유골함)로 돌아왔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6.25 때 징병 나이를 넘기고도 전시 상황에 휘말려 길에서 걸리면 바로 군대로 끌려갔죠~~~ 그 시기를 지나자 남자 최소 인구비율을 갖게 되죠. 그래서 살아남은 이들은 동갑들을 모아서 최초의 '갑자계'란 것을 만들어 유행시켰답니다. 슬픈 우리 갑자 ~~'울지마라 갑자생'. 징용이나 정신대 등은 또 다른 반강제, 강제, 유혹, 공갈협박, 속임수 등 악질적으로 인력을 수탈하거나 인권을 유린한 것으로, 특정 세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목적에 부합하는 비슷한 연령이면 합법 비합법 수단을 가리지 않고 대상으로 삼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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