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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아들 많이 낳으려 이름까지 바꿨다는 조선 정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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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 2010-10-04 06:05 

 

"정조, 아들 많이 낳으려 이름 바꿨다"

안대회 교수 "후손 많은 사람 이름 낚아채 '이산→이성'"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세종과 더불어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후손, 특히 아들을 많이 두고자 본래 성명인 '이산李祘'의 발음을 '이성'으로 바꿨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국한문학 전공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정조의 이름은 원래 '이산'으로 읽었지만 1796년 8월 11일 규장전운奎章全韻이라는 한자의 소리 사전 발간을 계기로 외자 이름인 ''의 발음을 '성'으로 바꿨으며 정조 사후에도 이 글자는 '셩(성)'으로 읽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4일 밝혔다.

안 교수는 우선 규장전운과 같은 기록을 근거로 정조의 본래 성명은 '이산'이 아니라 '이셩' 혹은 '이성'으로 읽어야 한다는 한문학자 남현희 씨의 2008년 주장을 반박하면서 ''은 규장전운 발간 이전까지만 해도 '산'으로 읽힌 사실이 명백하다고 말했다.

 

정조 이름 보이는 정음통석正音通釋. 1781년 조선 국왕 정조가 친제 서문을 써서 내각에서 간행한 박성원朴性源 편저. 이른바 내사본內賜本으로 본래 강이천姜彛天(1769~1801)이 소장했다. 한부翰部의 산算이라는 글자에 별도 표식을 하고 그 상부 난외에다가는 임금, 즉, 정조의 이름임을 표시하는 어휘御諱라는 말을 기입했다. 정조 이름이 본래는 '산'으로 읽혔다는 증거라고. 



그 근거로 안 교수는 1776년 정조가 즉위한 그해에 자신의 성명과 같다고 해서 평안도와 충청도 고을인 이산理山과 이산尼山을 각각 초산楚山과 이성尼城으로 바꿨는가 하면 ''이 본래 '算'의 옛 글자체임을 들어 산학算學을 주학籌學, 산원算員을 계사計士 등으로 각각 바꾼 사실 등을 들었다.

이랬던 정조가 자신의 성명을 바꾼 것은 그가 1792년 3월에 이덕무李德懋에게 편찬을 명령한 규장전운이 완성되던 시점인 1796년 무렵이라고 안 교수는 지적했다. 규장전운은 1796년 7월에 인쇄가 끝나고 다음달인 8월에 전국에 배포했다. 이때 발행부수는 무려 1만부에 달했다.

정조는 인쇄 준비가 거의 끝난 시점에 갑자기 그에 수록된 '渻(성)'이라는 글자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자기 이름인 ''이라는 글자를 집어넣었으며 이렇게 해서 ''이라는 글자는 이후 발음이 '성(셩)'으로 바뀌게 됐다고 안 교수는 주장했다.

안 교수는 정조가 자기 이름의 발음을 바꾸게 된 것은 아들을 많이 낳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은 19세기의 저명한 중인 문사인 옥산玉山 장지완(張之琓, 1806~?)이 남긴 비연외초斐然外抄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안 교수는 전했다.

당시 저명한 여항문인인 장지완은 이 글에서 정조의 이름은 본래 '산(算)'으로 읽었지만 그 뒤에 고증을 거쳐 규장전운 발간을 계기로 '성'으로 바로잡았다고 하면서 "한데 계란界欄(인쇄의 판식)이 벌써 정해졌기 때문에 '渻' 자를 삭제하고 임금 이름을 채워 넣었다. 왜냐하면 '渻'이라는 글자는 서약봉徐藥峯의 이름으로 자손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고 했다.

 

19세기 저명한 중인 문사 옥산玉山 장지완張之琓(1806~?)이 남긴 비연외초斐然外抄 필사본. 장서각 소장인 이 글에 의하면 정조의 이름은 본래 '산算'으로 읽었지만 그 뒤에 고증을 거쳐 규장전운 발간을 계기로 후손을 많이 둔 서약봉徐藥峯 이름을 빌려 '성'으로 발음을 교정했다고 한다. 



서약봉은 바로 서성(徐渻, 1558~1631)이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경화세족인 대구(달성) 서씨의 중흥조로서 서종태·서명선·서명응을 비롯한 많은 정승 판서는 물론 서호수·서유구와 같은 위대한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 중의 명문가의 직계 선조였다.

결국, 정조 이름의 원래 발음은 '산'이었지만 자손을 위해 '성'으로 바꾸기 위해 이름의 '산'을 규장전운 내의 성자와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름의 발음을 바꿀 당시 정조는 자식이 귀한 처지였다.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왕비 청풍김씨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으며, 의빈성씨 소생인 문효세자는 요절했다. 늦게 수빈박씨에게서 순조를 낳았지만, 규장전운 완성 당시 겨우 7살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까지 바꿔 많은 후손을 두기 바란 정조의 꿈은 허망하게 끝났다. 아들 순조를 지나 손자 현종 대에서 정조의 대는 끊겼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이런 연구성과를 최근 학술모임인 '문헌과해석'에서 발표한 데 이어 조만간 학회지에 정식 투고할 예정이다.

 

안대회. 이 양반 이름도 참 묘해. 大檜. 장자에서 온 듯한데 모르겠다. 

 

****

 

이상과 같은 반론을 부른 문제의 남현희 씨 주장은 아래와 같다. 

 

2008.02.01 11:39:36
<정조 본명은 '이산' 아닌 '이셩'>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8세기 바람과 그에 편승한 정조(正祖) 붐은 급기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듯하던 그의 본명까지 각광받게 하고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MBC 대하드라마 '이산'은 그의 본명을 타이틀 롤로 삼았다. 

 

정조의 본명은 '李祘'. 이를 드라마는 '이산'이라 읽었으며, 실상 이것이 현재의 가장 일반적인 표기라 할 수 있다. '李'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왕실의 성씨를 말함이니 '祘'이 바로 그의 이름이다. 이 글자는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거의 쓰임이 없는 글자다. 


이처럼 사용빈도가 현격히 떨어지는 한자로 이름을 삼는 까닭은 피휘(避諱) 때문. 피휘란 신성한 글자의 사용을 금기시하는 전통을 말하는데, 그 대상은 다양하지만 가장 엄격히 준수해야 하는 경우가 바로 해당 왕조의 역대 군주나 부모-조부모의 이름이었다. 

 

이 피휘 문제 때문에 전통시대 지식인들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서로가 처음 인사를 나눌 때면 반드시 상대방 부모와 조부모의 휘(諱, 이름)를 먼저 확인해야만 했다. 

 

조선시대 군주는 대체로 외자 이름을 선호하고, 나아가 그런 외자가 좀처럼 쓰이지 않는 글자인 까닭은 이런 피휘에서 말미암았다. 사용빈도가 높은 글자를 이름으로 쓴다면, 그 글자는 공문서, 사문서는 물론이고, 입에조차 올리지 못하는데, 그에 따른 생활 불편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의 이름 ''이란 글자를 '산'이라고 읽는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각종 옥편이 그렇게 발음 기호를 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시중 옥편은 그렇게 읽었을까? 

 

지금의 시중 옥편 편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표준격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시대에 황제의 명령으로 편찬되었다 해서 이름까지 강희자전(康熙字典)인 사전이다. 하지만 국내 옥편계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에 의하면, 국내 옥편으로 이 강희자전을 직접 모델로 삼은 경우는 드물고, 거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발간된 옥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어떻든 이 강희자전을 보면 ''이란 글자를 '오집하(午集下)'의 시(示) 부수에 포함시켜 표제항목으로 제시하면서, 당운(唐韻)과 집운(集韻)이라는 앞선 시대 운서(韻書)를 인용해 "蘇(소)와 관(貫)의 반절(反切)이며 '算'(산)과 같이 발음한다"고 했다. 

 

이에 의한다면 '' 글자는 '산' 정도로 발음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글자를 이렇게 발음하는 전통은 후한시대 중기 때인 서기 100년 허신(許愼)이란 경학자이자 음운학자가 완성한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사전에 이미 나타나 있는데 이곳에서도 발음을 '讀若算(독약산)', 즉 '算'이라는 글자처럼 읽는다고 소개했다. 

 

그 의미에 대해 설문해자는 "明視以算之(명시이산지)" 곧, 밝게 살펴서 헤아린다고 풀었다. 한마디로 잘 살핀다는 뜻이다. 

 

한데 문제는 '祘' 글자를 조선에서는 '산'이라고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무엇보다 본명이 '祘'인 바로 그 임금 정조가 재위하던 시대에 그의 명령으로 규장각이란 학술 아카데미에서 편찬해 완성한 사전에서도 이 글자를 결코 '산'이라 발음하지 않았다. 

 

정조가 사망하던 바로 그해인 1800년에 완성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과 그 색인집으로 거의 동시에 나온 전운옥편(全韻玉篇)을 보면 이 글자를 '어휘(御諱)' 즉, 임금님의 이름으로 사용을 피해야 하는 글자라고 규정하면서 그 한글 음을 '셩'이라고 달아놓았다. 

 

'규장전운'이란 타이틀 앞에 붙은 '어정御定'이란 임금이 정한 것이라는 의미로, 이 발음사전이 다름 아닌 당시의 군주 정조에 명령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고, 그것을 정조 자신이 감수한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구한말-식민지시대 어문학자인 지석영(池錫永. 1855-1935) 또한 '자전석요'(字典釋要)라는 한자 사전에서 이 글자 발음을 '셩'이라고 했다. 

 

한문학자 남현희씨는 최근 정조 어록집인 일득록(日得錄)을 역주한 단행본(문자향 펴냄)을 출간하면서 부친 그 서문에서 이 문제를 집중 거론하면서, 복모음의 단모음화를 고려한다 해도 정조의 본명은 '산'이 아니라 '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자는 조선시대 임금 이름이야 어차피 거의 쓰이지 않았을 터인데 무슨 대수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기(禮記) 중 자잘한 생활 예절을 다룬 곡례 상(曲禮上)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이름을 대고, 임금 앞에서 신하는 이름을 댄다"(父前子名, 君前臣名)고 했다. 

 

이에 의해 정조 또한 할아버지 영조나 아버지 사도세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 등등 앞에서는 반드시 이름을 대어야 했으며, 특히 선대 왕들을 제사지내는 제문에서도 반드시 이름을 밝혀야만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영조가 정조를 부를 때도 틀림없이 "셩아" 라는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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