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서비스업에는 아버지나 나나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관광산업을 위해 정부에서 큰 기업들은 다 호텔을 하나씩 지으라고 해서 우리는 당시 영빈관이 있던 장충동 일대를 매입해서 호텔을 세우기로 했다. 그 호텔은 가능하면 삼성에서 하지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공사를 늦추다가 '78년 임페리얼에서 신라로 이름을 바꾼 후 완공되었다....요즘도 나는 경주에 가끔 가보는데 그 역시 당시 박대통령의 지시로 개발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경주는 발굴 전의 모습보다는 훨씬(이상 236쪽) 더 훌륭하다. 그러나 그 역시 민간인들에게 처음부터 다 맡겼더라면 더 좋은 상태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도 경주 불국사 일주문 입구의 건립비에는 '박대통령의 높은 뜻'과 더불어 당시 경주 개발에 참가한 기업과 대표자의 이름들이 적혀 있다. 기업들은 경주 개발을 위해서 기부금을 내거나 혹은 공사를 무료로 하는 등 여러가지로 참가를 했다.
건립비에는 조중훈(한진상사 회장).....씨 등의 이름이 적혀있다. 나는 한일합섬 김한수 회장 다음에 세 번째로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 회장 이맹희'라고 적혀 있는데 당시 내 직책은 부사장이었고 그분들이 다들 나보다 훨씬 높은 연배들이어서 퍽 송구스러웠다. 그러나 제일모직의 직원이 다들 회장님들인데 혼자서 '부사장 이맹희'라고 적기가 어색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다가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비석 조각을 다한 상태여서 그대로 둘수밖에 없었다.
당시 삼성은 기부금 1천만원을 냈고 그 외에 내가 경주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뜻에서 경주개발의 공사를 총괄적으로 진행했다. 정부측에서는 당시 신범식 비서가 이 일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진행했다.(이상 237쪽) (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청산, 1993)
(2016.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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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史에서는 좀체 드러나지 않는 대한민국사 단면 곳곳을 폭로하니 우선 70년대 재벌들이 호텔을 하나씩 지은 이유가 당시 박정희 유신정부가 추진한 관광산업 진흥 일환이었음을 본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일환으로 70년대 불국사 대대적 정비가 있었고, 그에는 기업들에서 갹출한 성금이 토대가 되었다는 기술은 산발로 보이지만, 그 구체적인 실상을 이렇게 생생히 드러내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 경주개발에 대해서는 중요한 증언들이 이맹희 회고록에 더 있으므로 그건 따로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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