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거란에 준 충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었다. 이 전쟁은 공식으로는 1019년, 개태開泰 8년 2월에 종식되었지만, 그 수습은 그해 내내 계속됐다.
그해 3월, 수뇌진을 처벌한 거란 성종 야율륭서는 그해 6월 무자戊子에는 고려를 정벌할 때 전몰한 장교의 자제들을 조사한 데 이어 그달 을사乙巳에는 남피실군교南皮室軍校 등이 고려를 토벌한 공이 있다 해서 금백金帛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요사 성종본기)
이것으로 부족하다 생각했음인지 같은해 가을 7월 기미己米에는 고려를 정벌하다 전몰한 여러 장수의 처한테 조칙을 내려 봉록을 더해주게끔 한다. (요사 성종본기)
물론 이 전쟁이 참혹한 거란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렇다 해서 아주 그들로서는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을 감출 만한 전공을 필요 이상으로 포상해야 하는 고심도 적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그래야 그것으로 패배를 어느 정도 분식하므로 말이다.
거란으로서는 고민이 이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다. 수뇌진 몇을 제외하고는 몰살했으니 말이다.
과부와 고아가 넘쳐났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자칫 거란 사회가 동요할 수 있는 문제였고, 실제 이를 야율융서와 거란은 두려워해야 했다고 본다.
이런 전후 수습책을 거치고는 분이 풀리지 않은 거란은 그해 팔월 경인庚寅에는 낭군郎君 갈불려曷不呂 등을 보내어 각 부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군을 모아서 고려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요사 성종본기)
하지만 제대로 시행될 리 있겠는가? 가뜩이나 대참패에 뒤숭숭한데 또 고려를 정벌한다니? 이러다가 작은 나라 정벌하겠다 해서 제국이 무너질 판이었다.
이 전쟁이 준 충격파는 그렇게 컸다.
역사상 제국은 그렇게 해서 무너졌다. 작은 실패 혹은 큰 실패 하나가 걷잡을 수 없는 제국의 균열을 초래했다. 멀리 수 제국이 그렇게 순식간에 몰락했다. 고구려 정벌하겠다 해서 백만을 동원했다가 실패하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멸망했다.
거란 역시 당대 최강국이라 하지만, 그 질서는 실은 불안하기 짝이 없어, 소수의 거란족이 무수한 이민족을 지배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들은 호시탐탐 반역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한 군데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다 무너진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야율륭서와 거란한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망하거나, 아니면 고려가 스스로 몸을 굽혀 다시 신하가 되겠다고 들어오는 것.
다행히 후자의 기회가 왔다. 고려가 스스로 신하가 되겠다고 들어온 것이다.
거란으로서는 울고 싶은데 뺨을 휘갈겨 준 셈이었다. 이제 화해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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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11) 대패한 소배압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야율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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