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 전황을 주요 전투 장면을 시간순서대로 잘 정리했다.
이를 다시금 상기하면 고려 현종 9년, 1018년 12월 10일 거란군은 흥화진에서의 서전 이래 대략 3개월을 곳곳에서 판판이 깨지다가 이듬해 2월 1일 귀환 길목 귀주에서 대패하고 군사 대부분을 읽고서 수뇌부 몇 명을 포함한 일부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한데 이 전투 사정이 요사 遼史 성종聖宗 본기에서는 개태開泰 7년, 1019년 12월에 날짜를 특기하지 아니한 채 한 순간 전투에서 대패한 것으로만 적었을 뿐이다.
고려 쪽 기록과 비교할 때 요사 쪽에서는 거란군 패전을 부러 축소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전쟁에서 진 일이, 더구나 한참 아래로 본 고려한테 개발살난 일이 무에 자랑할 거리라고 대서특필하겠는가?
요사 본기 관련 언급은 다음과 같다.
(12월) 소배압蕭排押 등이 고려군과 다하茶河, 타하陀河 두 강에서 싸웠는데 요나라 군대[遼軍]가 전세가 불리해 천운天雲과 우피실右皮室 두 군대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고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달과阿果達와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清明, 천운군상온天云軍詳穩 해리海裡 등이 모두 죽었다.
고려 쪽 기록보다 이쪽은 외려 피해 양상이 더 구체적인데, 이 전쟁에서 죽은 거란군 수뇌진을 나열했다.
나아가 죽은 원인으로 익사, 그 전투장으로 다하와 타하라는 강을 든 점을 볼 때 이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말하는 12월 10일 흥화진 전투를 말함이 분명하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흥화진興化鎭에 이른 거란 군대를 흥화진 동쪽 큰 강을 쇠가죽을 엮어 막았다가 순식간에 터뜨려 대승을 거뒀다고 한다.
저 다하와 타하가 어느 강인지 확실치는 않거니와 흥화진 동쪽을 흘렀음을 분명하지만, 흥화진부터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환장할 짓 아니겠는가?
패배에 대한 책임 추궁은 3월 을해일에 나오게 된다. 요사 본기 그 내용이다.
동평왕東平王 소한녕蕭韓寧·동경유수東京留守 야율팔가耶律八哥·국구國舅이자 평장사平章事인 소배압蕭排押과 임자요지林牙要只 등은 고려를 토벌하고 돌아왔지만 명령을 어긴 죄에 연루되어 그 죄를 따진 다음에 석방했다.
같은 달 기묘일에는 고려를 정벌할 때 공이 있는 발해의 장교관將校官들한테 조칙을 내려 벼슬을 더하여 주라 한다.
예서 이상한 점은 왜 책임을 더는 묻지 않았을까다. 군율을 어긴 데다, 대패를 하고 돌아왔는데도 왜 없던 일처럼 할 수밖에 없었는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종과 당시 거란의 고민을 읽어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쪽팔려서다.
더는 소문이 나지 말아야 했다. 그 패배가 외부로 크게 알려져서는 황제와 거란의 가오가 상하는 까닭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는 위신의 문제였고 그를 위해 패배는 분식 세탁해야 했다. 마치 이긴 것처럼 말이다.
이는 그 직후 취한 조처와 대비할 때 더욱 뚜렷하다. 수뇌부는 죄상만 따지고 이렇다 할 책임은 묻지 않는 대신, 그 전쟁에 공로가 있다 하는 사람들을 골라내어 포상하는 쇼를 연출함으로써 패배를 숨기려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 저 처벌 내용을 볼 때 동평왕東平王 소한녕蕭韓寧과 임자요지林牙要只는 출정식에는 이름을 보이지 않았다가 저에서 비로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어찌 해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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