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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10) “도통은 소배압, 부통은 소허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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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 전쟁은 고려사랑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 측 기록(더 정확히는 그것을 정리한 조선초 이데올로기)이며, 이 전쟁이 거란 쪽에서는 어찌 기억되었을까?

그 흔적은 요사遼史 성종본기聖宗本紀와 이 전쟁에 종군한 사람들 열전에 남았으니 이를 살펴야 한다. 

이 전쟁이 요사에서는 권16 본기 제16 성종聖宗7에 남았다.

이 전쟁을 일으킨 1018년, 고려 현종 9년은 거란으로서는 개태開泰 7년이라, 이해 3월 신축辛丑에 동북쪽 월리독越里篤과 부아리剖阿里·오리미奧裏米·포노리蒲奴里·철려鐵驪 등 5개 부部에 대해 세공歲貢으로 초피貂皮 6만5천 장과 말 300마리를 바치게 했다 하는데,

내가 아무리 봐도 이는 그 연말에 있을 고려 정벌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저들 5개 부는 동북쪽이라는 위치를 특정하는 것으로 봐도 그렇고 여타 다른 흔적을 참조할 때 여진이었다. 이 전쟁이 여진한테도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데 거란 쪽 사정은 정벌군을 일으키기에는 여러 모로 이때가 적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 여름 4월 병인丙寅에는 황제가 천주川州와 요주饒州 두 개 주에 기근이 들었다 해서 친히 행차해 진무하는 일도 있었고 그달 신미辛未에는 중경中京의 궁핍한 백성들을 진무하기도 했다. 천주와 요주는 동방정벌의 근거지가 되는 동경이 있는 쪽일 것이다. 

전쟁을 위한 본격 발동은 9월에 시작하는 모습이 포착되는데, 그달 경오庚午에 죄수들을 심사했다 하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죄수들을 군사로 충당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어 같은날 말을 징발해서 동정군東征軍, 곧 고려로 정벌을 떠나는 군사들한테 지급했다.

이달에 성종 자신은 토하천土河川이라는 데 여장을 풀었다는데, 아마 이곳에서 동정군 출정식을 하지 않았나 싶다. 

동정군 주요 진용은 겨울 10월 병진丙辰에 발표된다. 동평군왕東平郡王 소배압蕭排押이 총사령관인 도통都統이고 전전검도점검殿前都點檢 소허열蕭虛列이 부상령관인 부통副統, 동경유수東京留守 야율팔가耶律八哥를 도감都監으로 임명한다. 도감은 아마 고려군 진용에서는 판관 정도에 해당하는 감시관 아닌가 싶다. 

그러는 한편 고려, 특히 변방 장수들에 대해서도 엄포용 교시를 발포한다. 그 내용은

能率眾自歸者,厚賞;堅壁相拒者,追悔無及。

무리를 이끌고 순순히 귀순하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요, 성벽을 굳게 지키면서 항거하면 나중에 후회해봐야 국물도 없데이. 

이거다. 

이렇게 해서 보무도 당당하게 거란은 고려를 다시금 침공한다. 

주시할 대목은 당시 동원한 병력 숫자를 요사에서는 침묵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고 거란군 진용이 고려사에는 소손녕이라 잘못 적히기는 했지만, 소배압이라는 최고사령관만 특기할 뿐, 나머지는 논급이 없지만, 이 요사를 통해 그 일단을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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