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을 대하다 보면 모름지기 서하西夏를 매양 조우하는데, 이 서하는 거란이 한창 흥성하던 시절에는 물론 거란을 종주국으로 삼으면서 송과는 거란에 대해 같은 처지이면서도 시종 송과 치고 받는 모습을 연출한다.
거란 중심으로 보면 남쪽 송, 동쪽 고려, 서쪽으로 서하과 고창회골高昌回鶻을 접하거니와, 거란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물론 저들이 주변 외신外臣 제후들이었다.
다 거란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때마다 공납을 했고, 그네가 올 때마다 책봉이라는 이름으로 그 군주를 봉하는 형식을 빌렸으니, 저 무대가 훗날 몽고 제국 판도 아래 하나로 합쳐졌으니, 그러고 보면 몽고의 꿈을 참말로 장대했다.
거란이라 해서 왜 저들 지역을 모조리 정복할 수 없었겠는가? 다만, 그네들은 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오는 한 그 자치를 용납했던 것이지만, 몽고는 그러지 아니해서 그네는 직접 그네들 영토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었다.
다시 서하 이야기로 돌아가, 저쪽이 참말로 묘한 것이 많아, 그 주된 본거지야 지금의 감숙성이어니와, 저 감숙성은 이상하게도 나랑 인연이 없어, 나는 저쪽을 밟아본 적이 없다. 돈황석굴 찾아 남들 개떼처럼 갈 때 나는 광화문을 지키거나 다른 쪽을 배회했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저짝에 대한 관심이 덜한 한 원인이 되기는 할 것이다.
저네는 세종이 언문을 발명하기 훨씬 전에 이미 누가 봐도 한자 기반을 삼은 서하문자라는 자체 문자를 개발했고
인쇄술 또한 대단해서 그 분야를 선도했다는 고려를 위협하며
독자 동전도 만들어 유포했는가 하면
찬란한 문화를 구가했다.
서하가 땡긴다.
아직 본격으로 뛰어들지는 아니했지만, 조만간 쳐들어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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