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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16) 주력 상비 최정예군이 궤멸된 거란

by taeshik.kim 2024.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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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이라는 고려의 대승으로 끝난 이른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은 자칭이기는 하지만 거란군이 동원한 군사 규모가 이전과 비교해 적은 10만이라서 언뜻 보기엔 당시 거란 국력을 고려해 이 정도는 전면전이 아니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다. 

그도 그럴 것이 서희의 담판으로 끝난 1차 전쟁에 언필칭 80만, 성종 야율륭서가 친정한 2차 전쟁에 40만을 동원한 것과 비교하면 현격하게 적은 숫자인 까닭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 숫자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그 질이 문제인 까닭이다. 

80만, 40만이라 하지만 이는 실상 그 보급부대를 합친 것이라, 실제 전투를 치르는 군사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다. 10만이라 해도 실상 아무리 거란 국력을 고려해도 만만찮은 숫자다. 

이 3차 전쟁을 어떤 자세로 준비했는지는 요사遼史 성종본기에서 읽어낼 수 있는데, 이 전쟁을 임하는 성종과 거란 움직임을 보면 간단치는 않아서 이번에는 기필코 고려를 쓸어버리겠다는 각오가 짙게 느껴진다. 

왜 10만이었을까? 

그 십만이 거란군 앙코였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 투입된 전력이 어떤지는 요사 성종본기와 이국외기二國外記에 보이는데, 실제로는 1019년 2월 1일이지만, 거란 쪽 기록에는 1018년 12월 한 번의 전투로 기록된 다타이하지간茶陀二河之間 전투에서 기록된 참상에서 드러난다.

고려 측 기록에서는 귀주貴州에서 있었다는 이 전투에서 퇴각하는 거란 주력군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소배압을 비롯한 수뇌진과 군사 수 천만 겨우 목숨만 건져 빠져나가고, 전군이 몰살됐다.

물론 그 이전 크고작은 전투에서 무수한 살상 피해를 본 거란군이 이 전투 하나로 9만 이상이 되는 인명이 한꺼번에 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축군 전부가 몰살당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뇌진은 빠져나갔다 했지만, 그것도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지금으로 치면 장군급도 절반 이상 목숨을 잃었으니 전몰자 명단으로 요사에서는 천운군天云軍 상온詳穩 해리海裏와 요련장遙輦帳 상온詳穩 아과달阿果達과 객성客省 작고酌古와 발해渤海 상온詳穩 고청명高清明을 특별히 거론했다.

이 전투 피해 양상으로 요사는 천운天雲과 우피실右皮室 두 軍을 특별히 거론하면서 그네들 중 몰익자沒溺者가 특별히 많았다고 특기했다. 바로 이 대목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왜? 이 두 군이 거란 상비군 최정예 전력인 까닭이며, 이것이 바로 왜 이 전쟁에 거란이 종전과는 달리 10만 명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동원했는지 그 비밀이 숨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운군과 우피실군이 도대체 어떤 군대이기에?

천운군은 그 실체를 가늠할 만한 데가 없다. 요사를 뒤져 봐도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딴 데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피실군보다 앞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우피실보다 상위 군대로 취급되었거나, 혹은 적어도 그에 버금하는 군대로 인식됐음을 안다. 

따라서 천운군의 실체는 현재로서는 짐작밖에는 없지만, 우피실군을 해명함으로써 그 실체를 접근한다.

그에 앞서 천운군은 그 명칭으로 보아 볼짝없다. 황제 직속 최정예 부대다. 天雲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이름을 황제 직속 군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다. 

우피실 역시 최정예 기갑부대다. 요사 권46 지志 제16 백관지百官志2 북면부족관北面部族官을 보면, 피실皮室이라는 이름이 붙은 군부대가 차례로 등장하는데, 좌피실左皮室·우피실右皮室·북피실北皮室·남피실南皮室·황피실黃皮室이 그것이라 볼짝없이 오행五行 혹은 오방五方 관념에 기초한 황실 호위 부대를 말한다. 

예서 좌우는 곧 동서라, 북쪽 중앙에 앉아 남쪽 태양을 향해 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그 왼쪽(東)과 오른쪽(서쪽)을 각각 방어하는 호위 부대라는 뜻이다.

그에다가 남북 피실이 있고, 나아가 중앙은 오방에 의하면 황색이므로 황피실이라는 호위 부대를 별도로 둔 것을 알 수 있다. 

피실皮室은 언뜻 거란어를 옮긴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지만, 내 보기엔 택도 없는 소리라, 글자 그대로 황제를 보위하는 피부와 같은 군대의 온실이라는 뜻으로 그대로 한자어다. 

이들 방위군을 관장하는 사령부를 상온사詳穩司라 하고, 그 장관을 상온詳穩이라 했다. 대통령 경호부대장들인 셈이다.

한데 중앙을 관장하는 황피실黃皮室만큼은 상온사라 하지 않고 위부韋部라 한 점도 특징이다. 

요사 백관지에는 태종太宗이 천하의 정예 갑사[精甲] 30만을 선발해 피실군皮室軍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피실군 뿌리로 태조 야율아보기 시대를 논급했으니,

태조가 행영行營을 그대로 궁宮으로 만들면서 여러 부족 호준豪健 천여 명을 선발해 복심부腹心部를 삼고는 야율노고耶律老古를 그 공로를 인정해 우피실상온右皮室詳穩을 삼은 일을 논급했으니, 이것이 바로 황제 호위군대 시초라 했다. 

태종 시대를 기준으로 피실군이 30만이었다. 

천운군은 이 피실군보다 위상이 높았다. 혹 천운군은 명칭으로 보아 황피실黃皮室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는데, 아무튼 이 황제 직속 호위 최정예 부대가 고려군에 몰살당한 것이다.

고려사나 거란사 전공자들이 이 점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지 않았나 해서 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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