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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5) 거란에 무슨 일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란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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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내부에 도대체 무슨 일이?

 

거란이 군사를 동원하는 데는 패턴이 있어, 예외는 없지는 않으나 저들 또한 겨울을 이용했으니, 이때가 말할 것도 없이 농한기인 까닭이며, 유목 전통이 강한 저들은 이때를 빌려 거개 사냥을 하곤 했으니 이때가 군사를 동원하기 위한 적기였다. 

요새 군인이라면 사시사철 각종 훈련을 해대지만 이는 적어도 직업 군인 혹은 그에 징발되어 일정기간 복무하는 근현대 군대 시스템을 말하며, 전근대는 이와 같은 전업적 군대 육성 시스템은 운영할 수도 없었으니 간단히 돈 때문이었다.

돈이 엄청나게 들었고, 그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댈 재간이 없었다. 

특히나 당시는 몸으로, 숫자로 떼우는 시절이라, 군대 동원은 곧 다른 공공부문 인력 상실을 의미했고, 그네들이 전부 농사를 짓거나 유목을 해야 하는 까닭에 한가롭게 군대 가서 건빵 먹고 총질을 연습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주 직업군인이 없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지만 그 상시 운용에는 적지 않은 고충이 따랐다. 

이를 타개하고자 전근대가 채택한 방식이 병농일치 둔전제였다. 평소에는 농사 짓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군인으로 돌변하는 시스템이니, 그네들 전투력이라 해 봐야 쪽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들을, 심지어 여자들까지 단 한 순간에 강철 군인으로 만든 이가 손빈인가 손무였다. 

그가 군사를 훈련하는 방식은 익히 알려졌거니와, 왕이 지켜 보는 가운데 그의 무수한 후궁들을 불러다 놓고는 군사 훈련을 시키는데, 키득키득하는 후궁 한 명을 골라 그 자리서 목을 날려 버리니 그 순간 강철 군대로 돌변해 아마존 여전사들을 만들었다. 

 

쏟아지는 난민



이 이야기는 다시 뒤에서 하기로 하고, 3차 대전 전운이 감도는 이 시절, 곧 1016~1018년 무렵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이상한 현상이 감지되는데, 거란에서 도망쳐 나온 거란인 혹은 여진인이 고려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거의 매달 도망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1017년을 보면 8월에 동여진東女眞에서 개다불蓋多弗 등 4명이 내투來投해서는 공을 세우게 해 달라 하고 같은 달에는 서여진西女眞 개신揩信이라는 자가 거란 동경東京의 불교 승려 도준道遵을 사로잡아 들어온다. 

이 무렵 거란 소합탁蕭合卓이 흥화진興化鎭을 9일간이나 포위 공격했지만 장군將軍 견일堅一·홍광洪光·고의高義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한다. 

또 같은 달 흑수말갈黑水靺鞨에서 아리불阿離弗 등 6인이 내투하니 남쪽 주현州縣에다가 나누어 집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이듬해 1018년으로 가서는 그해 1월에 정안국定安國 사람인 골수骨須가 도망쳐 오니, 정안국은 이미 망한지 오래인데 뭔가 문제가 생겨 퓨저티브가 된 듯하다. 4월에는 서여진 목사木史와 목개木開 등 200호가 내투한다. 

그해 12월에는 거란 사람 왕수王遂가 내투한다. 

 

이 질서에 뭔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거란과 여진 내투자가 폭증하는가?

이를 감지하고자 요사를 죽 훑었지만, 그럴 이유을 감지할 만한 계기가 없다. 요사 쪽에서 뭔가 기록을 누락했음에 틀림없고, 무엇인가 저 무렵에 거란 내부가 흔들린 일이 있었음은 틀림없다. 

관건은 고려. 저들은 단순히 저들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그들을 통해 거란과 여진 내부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했다.

그런 정황 혹은 증거는 없지만,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을 취조했을 테고, 이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거란 내부 사정을 염탐한 것이며, 나는 이것이 귀주대첩 대승리의 발판이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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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4) 전운이 감도는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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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다른 전쟁은 불가피했다. 아예 거란과의 문을 닫아버리고 모든 관계를 단절한 고려로서도 전쟁을 불사했다. 아니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왜 이랬을까?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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