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과 여진인 내투來投가 이어지는 어수선한 상황은 이미 예고한 3차 고려거란전쟁이 어느 쪽으로 승리가 기울지를 암시했다.
고려 현종 9년(1018) 연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친 이 전쟁은 그 요란한 선전과는 달리 실상 거란이 동원한 군사가 그네들 기준으로 10만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그네들 일방 선전이라 실상 참전 규모는 더 적었다고 봐야 한다.
전쟁의 제1 홍보 조건은 뻥, 개뻥치기였다.
전쟁 홍보의 핵심은 성과는 과장하고, 피해는 숨기거나 최소화한다는 데 있다. 한 명 죽여놓고 백명 몰살했다 하고 백명 죽었는데 두 명 죽었다고 하는 짓거리는 러시아랑 우크라이나아 한 판 붙은 저 전쟁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무튼 자칭 10만이라는 거란군을 막고자 고려가 동원한 군대가 놀랍게도 갑절이나 많은 20만이었다.
보통 공격하는 쪽이 쪽수가 압도적인데, 어찌해서 이 전쟁은 방어군 전력이 쪽수로는 압도적인가? 이 점이 미스터리다.
통상 귀주대첩이라 일컫는 고려 쪽 대승으로 귀결한 3차 고려거란전쟁은 전쟁 그 자체보다 그것이 초래한 이후 동아시아 체제 재편에 결정적이었다는 점에 의미를 더 두어야 한다.
물론 이 체제 재편이 고려의 대승에 있다는 사실도 잊지는 말아야 하지만 말이다.
이 전쟁이 더욱 놀라운 점은 대승을 이끈 고려군 수뇌진 편성이었다.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고, 활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 문관 나부랭이들이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이었다는 이 사실을 어찌 해명할까?
이 대첩을 이끈 총사령관 강감찬은 백면서생이었고, 더구나 948년생인 그는 이 전쟁 돌입 당시 이미 만 70세라, 정년퇴직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 부사령관으로 맹활약하는 강민첨 역시 아예 고려사 열전에서는 말타기 활쏘기를 못했다고 특기할 정도였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장수하는 관리는 70세가 시작하는 시점, 그러니깐 만 나이 기준으로는 69세가 시작하는 해 정월에 일단 사표를 던지고 왕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김유신이 그랬다. 천하의 595년 생 김유신도 70세가 되는 서기 654년 정월에 김춘추한테 사표를 던진다. 물론 그의 사표는 반려됐다. 아무리 김춘추가 김유신이 나댄다고 맘에 안 들어도 어찌 기다렸다는 듯이 사표를 냉큼 처리한단 말인가?
강감찬 역시 저때는 전시라 해서 어찌어찌 넘겼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표를 집어던진다.
물론 이 전쟁 영웅을 어찌 왕순이가 냉큼 알았소 수고했소 편히 쉬시오, 연봉은 두둑히 쳐서 계속 드리고 명예퇴직금도 더 얹어드리리다 하겠는가? 몇 년을 더 기다렸다가 그의 사표는 수리된다.
그 자신 생평을 전장에서 보냈고 혁혁한 전과를 올린 군인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은 쪽팔리게도 내일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백면서생 문관 영감탱이한테 몰살에 비견하는 참패를 맛보고 말았으니, 겨우 제 목숨만 살려 달아난 그는 아마 분통이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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