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8년 생인 강감찬은 70세에 도달한 1017년 정월에는 정년 퇴직하거나, 정년퇴직하고 싶다는 사표를 던졌어야 한다.
나는 틀림없이 강감찬이 저 시기에 저랬다고 본다. 그것을 현종은 반려했다. 다만, 사서에서는 누락됐을 뿐이다.
그건 현종으로서도 강감찬을 따로 써 먹을 데가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를 간접 증언하는 흔적이 고려사 현종본기와 고려사절요에 모두 보인다.
한창 전운이 감도는 현종 9년 1018년 5월, 현종은 강감찬을 서경유수 내사시랑평장사西京留守內史侍郞平章事로 삼는다. 서경유수 겸 내사시랑평장사다. 서경유수는 외직이고 내사시랑평장사는 내직으로 재상이다.
한데 서경유수를 임명하면서 그 임명장 뒤에다가 현종은 이상한 말을 쓴다.
“경술년(1010) 중 외적의 침입[虜塵]이 있게 되자 창과 방패가 한강漢江의 물가까지 깊이 침투해 들어왔소. 당시에 강공姜公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左衽]가 되었을 것이오”
강공의 계책이란 별게 아니어서 몽진이었다. 줄행랑이었다. 일단 튀고 보자.
당시 조정의 압도적인 여론은 무조건적 항복이었다. 이를 반대하며 홀로 강감찬은 몽진을 주장하며 훗날을 대비하자 했다.
이 일을 현종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거란과의 전쟁에서 개경을 지키는 길목 최고 사령관 겸 최고 지방장관에 강감찬을 앉힌 것이다. 이 정도 배짱이라면 고려를 지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일이 고려사 현종본기나 고려사절요에서는 대서특필되어 있는데, 이건 훗날 벌어진 전쟁 결과를 말해주는 정초定礎인 까닭이다.
그런 강감찬은 불과 다섯달 뒤인 그해 10월에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가 된다. 내사시랑평장사는 겸임하면서 말이다.
서북면행영도통사는 서경유수와는 또 달라서 이른바 강동6주를 낀 그 서북면 최전선 거란과 마주하는 지역을 통괄하는 최고 사령관이다. 임시사령관이라는 의미가 강할 것이다.
서경유수는 이때 면직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앙정부 재상 중 한 명으로서 서북방 지역을 방어하는 최고사령관까지 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감찬 근무지는 어디였을까? 나는 개경이라 본다. 개경에 근무하면서 가끔씩 초도순시 형식으로 지방에 출장내려갔다고 본다.
평소에는 그의 업무를 대행하는 넘버투가 현지에서 업무를 봤을 것이다.
동시에 고려 조정에서는 막판 극적인 타협을 시도한다. 같은 달 예빈소경禮賓少卿 원영元永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한 것이다.
그 결과는 함구하지만 이미 양쪽은 갈라설 대로 갈라선 형국이라 이는 쇼에 지나지 않았다. 왜? 곧이어 거란이 소배압을 앞세워 침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3차 고려거란전쟁은 팡파르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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