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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9) “네 낯 가죽을 벗겨 죽이리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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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배압이

 
앞서 봤듯이 거란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냅다 개경을 향해 남하했다. 심지어 서경도 오른편으로 돌린 채 남하했다. 이는 소배압 전술이 현종 사로잡기였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십만 거란군에 견주어 이십만을 동원한 고려군은 전력에 여유가 있었다. 일부는 거란군 꽁무니를 맹렬히 좇아 따라붙어 후미에서 들이쳤다.

강감찬은 그러는 한편 일부 부대는 빼돌려서 개경으로 서둘러 내려가게 했다.

(1019년) 봄 정월 경신, 강감찬은 거란 병사들이 도성 가까이에 이르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길을 서둘러 가서 경성으로 들어가 호위하게 하였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또한 병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고려사절요) 

소배압은 쏜살같이 달렸다. 1월 3일에 벌써 신은현新恩縣에 다달았다. 개성과는 거리가 불과 100리 지점.

하지만 승산이 없음을 소배압은 알았다. 

왕이 성 밖 민호를 거두어 안쪽으로 들인 후 들판을 비워놓고 적군을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소손녕(실은 소배압)은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으로 가서 군사를 돌릴 것이라고 알리게 하고는 몰래 척후기병[候騎] 300여 기를 금교역金郊驛으로 보냈다. 우리가 병사 100명을 보내서 밤을 틈타 급습하여 이들을 죽였다. (절요)

이를 보면 고려가 청야 전술을 펼쳤음을 본다. 속전속결을 원한 거란은 약탈로 군량을 조달했다. 벤또 하나 싸들고 말 타고 달려왔는데 니미럴? 먹을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군사를 돌렸다. 개경을 눈앞에 두고 공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거란군이 쫄쫄 굶었다고 본다. 

돌린 거란군은 1월 23일에는 연주漣州와 위주渭州에 도달했다. 이 20일 동안 거란군은 도대체 뭘 먹고 살았을까가 심히 궁금하다.

일부 약탈을 했겠지만 겨울에 먹을 게 있었겠는가?

불쌍한 배압이. 
 

낯 가죽 좋아한 야율륭서

 
한데 이곳을 고려군이 급습했다. 이때 공격에는 강감찬이 직접 나선 듯한데, 500여 명을 죽였다 한다. 500명,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나뒹구는 오백구 시체 무시무시하다. 

이미 만신창이 난 상태로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 주력 부대는 다시 열흘 정도가 지난 2월 1일 기축일에 구주龜州 들판에서  마주친다.

주력군끼리 첫 대결이자 마지막 조우였다. 이때는 거란도 사력을 다했다. 

거란 병사들이 구주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마주하여 싸웠으나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걸로 보아 일진일퇴 공방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그마한 변화도 전세에 영향을 주게 된다.

고려군으로서는 이때 천군만마를 얻었는데, 개경으로 급파해 거란군 꽁무니를 쫓은 김종현 부대가 다시 도망치는 거란군 꽁무니를 좇아 다시 북상해 본진에 합류한 것이다.

마침 바람 방향까지 변했다. 

〈이때〉 김종현金宗鉉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달하였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하니, 용맹한 기운이 배가 되었다. (절요)

이걸로 봐서 거란군이 도망치는 북쪽에 서고, 고려군이 그들을 좇아 남쪽에 섰음을 본다. 그런 판국에 강한 남풍이 불어제낀 것이다.

비가 왔으니 화공은 힘들었을 테고, 바람을 등진 화살이 비오듯 가속도를 내며 거란군 진영으로 날아들었을 것이다. 

거란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아군이 그 뒤를 쫓아가서 공격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절요)

이로 보아 거란군은 도망치다가 거의 다 죽었음을 알 수 있다.

후방에서는 힘겹게 공세를 차단하면서 선봉 부대는 줄행랑을 쳤다. 이 선봉 부대에 소배압이 포함됐다.

부하들이 몰살한 마당에 그는 겨우 목숨만 건졌다.

이어지는 기술에서 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거란지패, 미유여차지심[契丹之敗, 未有如此之甚],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도망친 소배압은 아마도 동경성 정도에서 전투 상황을 성종한테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거란의 군주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소손녕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감으로써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인가?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겨낸 이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책망에서 거란군 전술 일단을 본다. 적을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거란이 참패한 원인이었다.

소배압은 그 책임을 지고 삭탈관직되었다가 훗날 복권된다. 다행히 낯 가죽 벗김은 면했다.

군주가 노하면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 분노가 누그러지면 살 방법이 생기니깐. 

이것이 바로 귀주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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