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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8) 거란군 꽁무니를 좇는 이상한 전쟁

by taeshik.kim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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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손녕이 이끈 1차엔 80만, 성종이 친정한 2차엔 40만을 동원했다는 거란이 1018년 현종 9년 12월에 단행한 3차엔 고작 10만을 끌고 왔으니 규모로 보아 거란으로서는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이건 다른 측면에서 봐얄 성 싶다.

거란으로서는 이 무렵 내부 사정으로 저 이상 되는 군대를 징발하기 힘들었다고 보거나 다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십만은 당시로서는 전면전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흔히 이 삼차전을 귀주대첩이라 하나 실상 이 전쟁은 최전방 흥화진에서부터 개경 근방까지 전선이 형성되었고 그에서 크고작은 전투가 잇따랐으며 실상 귀주대첩은 그 마지막 승리를 말할 뿐이다. 

이듬해 2월 1일 귀주대첩까지 3개월에서 약간 모자란 이 기간에 벌어진 모든 전투에서 고려는 완승했다. 특히 12월 10일 무술에 벌어진 흥화진 전투에서부터 고려는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를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묘사한다.

왕은 평장사平章事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대장군大將軍 강민첨姜民瞻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여 병사 20만8천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거란군이) 흥화진興化鎭에 이르자 기병 1만2천 명을 선발하여 산골짜기 한가운데에 매복시키고 또한 굵은 줄로 쇠가죽을 꿰어서 성 동쪽 큰 강을 막고서 적군을 기다리다가 적군이 이르자 막았던 강을 터뜨리고 복병들을 내보내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대목을 보면 고려군 본진은 영주에 주둔했음을 본다. 이곳이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라는데 구글어스에서 그 지점을 찍으면 다음과 같다. 
 

 
안다! 무엇을? 고려가 지금의 청천강을 1차 방어선으로 설정했음을 안다. 저 안주는 훗날 이야기지만 조선시대에는 외려 평양보다 번성했다는 기록도 보이는 대도회다. 

본진은 이곳이 주둔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했음을 본다. 흥화진에서 일단 막고, 그 지점에서 최대한 적한테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구사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이때 흥화진으로 고려군이 1만2천 명에 달하는 기마병을 동원했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이렇게 많은 기마병을 어찌 양성했으며, 그렇다면 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키웠단 말인가? 

사서에서는 무수한 것들이 누락됐지만, 이는 고려가 얼마나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했는지는 엿보게 한다. 그랬다. 고려는 이런 날이 오기만 기다리며 열심히 말 목장을 운영했다.

말 목장? 보나마다 섬에서 했을 것이다. 서해안 남해안 일대가 온통 말똥 천지였을지도 모른다. 

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소를 죽였기에 강물을 막을 만한 분량을 준비했다는 말인가? 모르긴 해도 이 무렵 고려 인민들은 말 키우느라 소 키우느라 허리가 부러져 나갔을 것이다. 

쇠가죽으로 막은 강물을 일시에 터뜨림으로써 도하하는 거란군 진영을 절반으로 잘라 버린 저 전투 무대가 어디였을까?

아쉽게도 당시 거란과의 쟁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흥화진이 어디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압록강 동쪽 지금의 신의주나 의주 일대 산성 혹은 그것을 근거지로 삼은 최전방 군사기지임을 분명하지만 알 수가 없다. 
 

 
산곡간 통과지점이 될 만한 후보지는 앞 지도 어드메쯤이 아닐까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고려군이 강물 작전을 펼쳤다는 지점도 어느 정도 유추는 가능하다. 
 

 
이 강이 아닐까 하는데, 물론 자신은 없다. 저 강을 무슨 강이라 하나? 
한데 더 이상한 점. 이 전투가 일어난 시점은 한겨울인데, 강은 얼었을 듯한데? 이것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다. 당시는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시즌이었을까? 

서전은 패했지만 거란군은 2차 전쟁에서도 그렇듯이 흥화진은 남겨두고 곧장 개성을 향해 남하하는 작전을 편다.

이는 아무래도 소배압 경험이 작동했을 법하다. 2차전에서 이미 이 전법을 썼듯이 그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이 대목을 고려사절요는 이렇게 기술한다. 

소손녕이 병사들을 이끌고 곧장 경성으로 달려가자 강민첨이 추격하여 자주慈州의 내구산來口山에 이르러 그들을 크게 패배시켰다. 시랑侍郞 조원趙元 또한 마탄馬灘에서 공격하여 만여 급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이로 보아 거란군 본진은 안주에서 진을 친 고려군 본진도 피해서 곧장 개경으로 치달려 내려갔음을 본다. 이들 경로를 보아 서경 또한 안중에도 없었던 듯하다. 다시 말해 이들은 곧장 개경으로 달려 개경을 함락한다는 전법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결국 결정적인 패착으로 작동한다. 

저들이 패했다는 자주慈州와 마탄馬灘 현재 위치가 각각 평안남도 순천과 평양직할시 승호구역 정도라 하는데 그 지점을 표시하면 거란군 진로가 확연히 보인다.
 

 
그랬다. 거란군은 서경도 오른편으로 돌리면서 그대로 곧장 개경을 향해 진격해 간 것이다. 

이런 전법에 실은 고려군이 당황했을 법하다.

드루와 했는데 드루오지 아니하고 그대로 냅다 남쪽으로 향해 달렸기 때문이다. 

다급한 쪽은 고려군. 이상하게도 고려군이 남진하는 거란군 꽁무니를 좇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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