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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1) 파탄난 고려-거란 외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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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거란이 처한 현실을 냉혹히 짚었다. 정복 왕조는 정복 자체가 그 왕조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고려와 거란 두 왕조가 직접 대규모로 충돌한 이 전쟁을 흔히 3차라 해서 세 시기로 분기하지만, 이는 근현대 사가들이 규정한 것일뿐 그 사이에 직접 군사충돌만 해도 무수했으니, 특히 그 충돌은 이른바 제2차와 제3차 전쟁 사이에 빈발했다. 

이들 전쟁을 개괄하면 서기 993년, 성종 재위 12년 이른바 1차 전쟁이 물경 80만(물론 개뻥이다. 수십 만에 지나지 않았다)을 주장한 그 군사력 동원 규모를 볼 때 비교적 순조롭게 끝난 까닭은 양국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외교협상이 빛을 발한 까닭이다.

당시 거란이 원한 것은 동아시아 세계의 맹주 패권국가 공인이었고 그 완결은 고려의 신속臣屬이었다.

당시 고려는 여전히 宋과 내왕하며, 송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그쪽에서 책봉을 받아오고 조공했으며, 연호 또한 송나라 것을 그대로 썼다. 이걸 거란이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서희라는 걸출한 외교 전략가를 배출한 고려는 실상 종주국 교체는 시점의 문제였지, 결국 거란으로 붙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혈혈단신 적진을 향해 들어간 서희는 그 도통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

그래 너희가 원하는 대로 다해주겠다. 우리가 이제 주인을 거란으로 교체할 테니 대신 나도 좀 물끼 있어야 한데이. 니는 나한데 머줄끼고? 내도 가오가 있다 아이가? 닌 황제한테 가져갈 선물 챙깄으니, 내도 하나 가고 가야 우리 임금님께 할 말이 있을끼 아이가? 난 땅뙤기 좀 받아야가야겠는데 어때 콜? 
 

이 말이야말로 정복왕조의 속성을 폐부로 찌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양국 사이에는 평화가 도래했다. 놀랍게도 그 평화는 전쟁이 초래한 직접 선물이었다. 전쟁이란 그렇게 냉혹하기도 하다.

그런 양국 관계가 강조에 의한 정변으로 다 뒤틀려 버린다. 권신 김치양과 총신 유충정을 토벌하면서 강조는 그 배후로 지목된 천추태후와 그 아들 목종까지 쓸어버렸다.

특히 후자가 문제였으니 목종 시해를 구실로 때마침 수렴청정 하던 절대 권좌 엄마 황태후가 사망하면서 막 친정을 개시한 거란 성종으로서는 이제 새 시대가 열렸음을 만천하에 각인할 빛나는 업적이 필요했으니 그것이 물경 40만(이 숫자 역시 개뻥이다. 다만 졸라 많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려 정벌이었고 그 명분을 강조가 만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는 뜻대로 되지 않아 이 전쟁은 양국 모두 참혹한 실패를 안겼으니 얻은 건 쥐꼬리요 잃은 건 막대한 물적 인적피해와 가오였다.

이 전쟁은 무엇보다 양국 관계를 파탄냈다. 개도 제 꼬리를 밟는 주인을 물어뜯는 법이다. 백제 정벌과 더불어 한반도 직접 통치를 노골화하는 당을 향해 저 위대한 걸물 김유신이 칼을 빼어들어야 함을 한국 역사상 가장 잘생긴 군주라는 김춘추한테 역설한 김유신의 말이었다.

그런 김유신 정신이 고려에 부활했다. 외교를 통한 양국 관계 회복을 주장하는 온건파가 힘을 잃었으며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매파가 득세했다.
 

이 시기가 송과의 전면전을 앞둔 때였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그에 더해 2차 전쟁이 끝나고서도 거란은 끊임없이 군사를 일으켜 소규모 군사도발을 계속 감행했으니, 이른바 강동육주는 그 전장터였다.

고려의 충신은 계속 이 강동6주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흥화진은 그 표상이었으니, 국가유공자를 양산하는 벤딩머신 같은 데였다. 

그런 와중에 현종 7년 1월 9일 갑인甲寅에 있기 힘든 일이 발생했다. 거란 조정에서 파견한 사신 10명(이라 했지만 실상 그 종사원들까지 치면 수백 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이 외교관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압록강을 넘으려 했지만, 미리 고려 조정에서 밀명을 받은 고려 변방에서는 이렇게 막아선다. 

돌아가시오, 여긴 당신들이 들어올 수 없소. 

이제 고려 거란 관계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다시금 대규모 군사 충돌을 불가피했다. 

넘을 수 없는 거란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강제적인 돌파가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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