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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2) 거란 버리고 宋에 접근했다 쌩까인 고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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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쥐새끼 같다 갖은 욕찌거리를 해댄 동파 소식. 그런 소식을 고려랑 조선에서는 신으로 쳐받들었다.

 
그나마 전쟁 속에서도 이어지던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해 버린 고려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宋과 붙어야 했다.

하지만 宋도 문제였다. 거란 대신 파트너로 선택하려 했고, 실제 993년 제1차 고려거란전쟁 직전까지는 고려의 종주국이었지만,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무엇보다 송 역시 거란에 대항할 힘을 상실하고 만신창이 난 상태였던 까닭이다. 

거란의 사신 입국과 고려에 의한 송으로의 외교 사절 파견은 동시였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그것이다. 

이런 양태가 훗날 동파 소식한테서 고려는 쥐새끼 같은 놈들이며 믿을 수 없다는 사자후를 토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하는 고려가 송으로서는 얼마나 얄밉겠는가?

하지만 송 또한 고민이 적지 않았으니, 그렇게 필요하다고 찾아온 고려를 내칠 수도 없었으니, 그리 되면 거란이랑 붙어 더욱 송을 압박할 것이 뻔한 까닭이다.

더구나 당시 송은 거란한테는 이미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고선 신속한 상태였던 데다, 무엇보다 서북방에서 서하西夏랑 죽자사자 너가 있음 내가 죽는다 해서 철천지 대원수로 사생결단식 쟁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러니 송으로는 그 속셈이 뻔히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고려를 마냥 내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거란이 두려웠다.

거란과 대척에 선 고려를 냉큼 받아들였다가 무슨 후환이 있을지 몰랐기에 온다 해서 막을 도리도 없었고, 간다 해서 잡을 명분도 없었다. 

그래서 이 시절 송에 들어간 고려 사신단 양태를 보면, 비록 조금 지난 뒷날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송나라 영역을 안방드나들 듯하면서 거리를 활보하지만, 그걸 송 조정이 어찌하지 못하고 골치만 아파하는 모습을 보인다.

간혹 동파 같은 꼰대가 잡아다가 족치기도 하지만, 그 후환은 동파 스스로가 짊어져야 했다. 혼난 건 동파지 고려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란과 관계가 파탄나서 그렇지 고려는 양쪽에서 곶감이라는 곶감은 다 빼먹었다. 거란에서는 종주국으로서의 보호막이요, 송에서는 문물 흡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1016년 연초 거란 사신단 입국을 거부한 그때 고려 조정에서는 곽원郭元을 단장으로 하는 대규모 외교 사절단을 송宋으로 보냈다.

외교 관계 회복을 위한 탐방이었으니, 곽원은 현종의 밀명을 받들고 갔다. 그 요지는 이랬다. 

우리가 다시 당신들을 종주국으로 섬기겠다. 너네들 책봉도 받고 꼬박꼬박 조공도 하겠다. 연호도 도로 송의 그것을 쓰겠다. 대신 우리랑 연합해서 거란을 대항하자. 

그러면서 곽원은 물었다.

콜?

한데 의외로 송에서는 No라고 답했다. 물론 외교 관례도 있고, 또 무엇보다 먼길을 마다 않고, 그리고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 해서 달려오기는 했으니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는 못하고 각종 외교 언사를 동원했지만 결국은 우리는 너희랑 같이하지 못한다는 완곡한 답변이었다. 
 

거란한테 줘 터지기는 마찬가지였던 북송 진종

 
이때 고려 사신이랑 같이 송으로 건너간 다른 외교사절단도 있다. 여진이었다.

여진 역시 당시 거란에 신속한 상태였지만, 그렇다 해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서 그 내부에서는 그런 대로 자율성이 있었다. 이 독립자율성이 훗날 거란을 엎어버리고 금 제국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답답하기는 고려나 여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려야 그 잦은 내침에 괴로워했거니와 여진 역시 문제는 툭하면 그 고려 정벌에 적지 않은 군사와 물자를 대야 했던 까닭에 거란에 대한 불만이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이 대목 고려사절요 증언은 다음과 같다. 

곽원이 송에 들어갔을 적에 때마침 여진女眞 또한 거란으로 인해 소동을 겪어 여러 해 동안 조회하지 못하였음을 호소하였다.

당시 송은 북송北宋 진종眞宗 19년이었다. 이 진종은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데, 무엇보다 도교 환자라 그에 혹닉하는 바람에 국고를 탕진하며 뻘짓을 해대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런 연대 제안에 진종은 이렇게 한다.

황제는 거란과 이미 맹약을 맺었기 때문에 답변을 곤란하게 여겼는데, 학사學士 전유연錢惟演이 조서의 초고를 써서 이르기를,
“짐은 다스리는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비록 영역을 나눔으로써 다른 점이 있게 되었다고는 하나 오로지 성심을 다하여 대우함에 있어서는 간극이 없어야 하는데, 그대의 본도本道를 생각하면 진실로 마음에 깊은 슬픔이 따르지만 이웃한 나라를 돌아보건대 또한 오랫동안 화친의 맹약을 좇아왔으니, 바라는 바는 화목하게 지내서 백성[黎蒸]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뿐이다.”

라고 하였다.

뭐 볼 것 없다. 답변은 해야겠는데 그것을 공식 외교 문서로 만들어 보라 한 것인데, 그 책무를 맡은 전유연이 아주 교묘한 말로 곤혹한 처지를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능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잘 표현했다는 것이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비록 거란이 이것을 본다 할지라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곽원에게는 칙령을 내려 개보사開寶寺를 유람하게 하고 은밀히 관반館伴이었던 원외랑員外郞 장사덕張師德으로 하여금 잘 타이르게 하였다.

저 외교문서라는 것 말이다, 저 표현에 나오듯이 생각보다는 보안이 개판이라, 시시각각 적국으로 그대로 들어갔다. 그때라고 간첩이 왜 없었겠는가?

거란과 내통하는 그 누군가를 그것을 빼돌려 그대로 거란에 직보했다. 그걸 진종은 안 것이며, 그래 이 정도 외교 문서라면 거란이 본대도 우리를 꼬투리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라는 요지다. 

한데 문제는 거란. 저 외교 문서 틀림없이 즉각 거란 조정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인데, 얼마나 고려가 얄밉겠는가?

하지만 이때는 거란도 어찌할 수 없었으니, 이미 고려가 외교 관계를 단절해 버리고 전쟁을 불사한 것이다. 

그렇게 저 시대도 정보 유통이 활발했다. 

그건 그렇고 한 대 얻어 맞은 고려사신 곽원은 가장 중요한 외교관계 수립에 실패하고서는 하릴 없이 답사나 하게 생겼으니, 속으로 얼마나 배알이 꼴렸겠는가? 

그렇게 해서 개보사 답사를 나선 곽원한테 그 답사를 수행한 카운터파트 장사덕張師德은 그 탑에 올랐을 적에 조용히 곽원한테 이렇게 말한다.  

“현재 도성의 높고 큰 건물들은 모두 군영이 되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셨음에도 오히려 다시 군졸들을 양성하고 날마다 전투 기술을 익히게 함으로써 북방의 변란에 대비하고 계십니다. 천자께서도 오히려 이렇게 하시는데, 하물며 귀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니 화친을 맺어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멀리 내다보는 계책이 될 것입니다.”

이는 장사덕 개인의 수사가 섞여있기는 하지만 당연히 송 조정에서 받은 밀지였다. 무슨 말일까?

간단히 말해 일단 거란과 화친을 하고서 조용히 힘을 길러야 한다 이 뜻이다. 그 힘에는 군사력도 당연히 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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