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8대 임금은 죽은 뒤에 받은 정식 시호가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이다.
현종은 묘호廟號라 해서, 죽은 뒤에 사당에 신주가 안치되면서 얻는 이름이니 그는 생전에 그가 이런 이름을 얻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생전 업적에 따라 신하들이 논의해서 후임 왕한테 올리면 크게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게 확정한다.
그는 태조 왕건 손자라 당연히 성씨는 王이다. 이름은 순詢이라 풀네임은 왕순王詢이다.
보통 18세 무렵 어른이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는데 이를 자字라 해서, 이때부터는 보통 이 이름으로 행세한다. 사람들이 그런 이름으로 불러도 시례가 아니다.
다만, 왕순은 성인이 될 무렵에 안세安世, 곧 세상을 평안하게 했다는 자를 얻기는 했지만, 자로도 일컬을 수 없었다. 왜? 왕이니깐.
그는 왕건 손자라 하지만 왕위계승권에서는 한참이나 멀어진 떨거지였다.
그런 그가 용케도 대권을 휘어잡았으니, 이것도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중이 되어 이곳저곳 떠돌다가 어느날 너 오늘부터 왕 해라! 해서 느닷없이 엎혀서 왕위에 앉았으니 말이다.
992년 8월 1일에 태어난 그가 왕위에 엎혀서 간 때가 1009년이니, 18세, 윤석열 나이로 17세 때 일이었다.
하도 비상시국이라, 또 이미 18세면 성인이라 해서 수렴청정이 보통은 없다.
다만 현종의 경우 수렴청정을 한다 해도 당시 이를 할 만한 왕실 할매도 모조리 사라진 뒤였다. 싹쓸이 판에 그냥 무혈입성한 것이다.
그걸 할 만한 천추태후도 아들 목종이 강조의 칼에 목이 달아나면서 같이 쫓겨나 유배길로 갔다가 영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러니 이 어린 친구가 어느날 느닷없이 까까머리도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너 왕 해! 하는 말을 듣고는 용상에 올랐으니 나라꼴이 말이 되겠는가?
하지만 모로 가건 바로 가건 서울만 가면 된다. 그렇게 앉아서 22년 간이나 왕 노릇 하시다가 1031년에 갔다.
이후 고려 왕조는 영원히 현종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줄줄이 깐 자식 중에 물경 셋이나 차례로 왕위에 앉았기 때문이다.
맏이 왕흠王欽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정실과 총애를 다투는 것으로 그려진 김은부의 딸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훗날 죽고 나서 덕종으로 칭해지는 고려 9대 왕이고,
그가 비실비실하다 죽자 또 다른 원성왕후 소생이 왕위를 이으니 그가 제10대 국왕 정종靖宗이라, 이가 고려 최대 성군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다시 그 후사는 왕휘徽한테 이어지니 바로 문종이라, 이가 형 정종과 더불어 고려 전성기를 구가한 절대 성군이다.
이 친구는 원혜왕후 소생이라, 바로 김은부의 다른 딸로서 원성왕후 동생이다. 김은부는 아예 세 딸을 모조리 헌종한테 바쳐서 국구國舅가 된다.
하긴 그러고 보면 현종 이후 고려 왕실에는 김은부 피가 흐른다.
왕순은 22년이라는 만만치 않은 기간을 재위했지만 죽을 때 불과 40세, 만 39세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왕조도 왕은 향년이 40대가 보통인데, 간단하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업무 스트레스가 극심하고 필드 나가 골프채 잡을 시간도 안 주고 신하들이 졸라 닦아세우기만 하니 나 같아도 그냥 죽고 만다. 그래서 왕들은 거개 다 일찍 갔다.
고려사절요 찬자들은 왕순을 일러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였으며, 배움에 있어 명민하고 문장에 뛰어났다"고 평하거니와, 글께나 읽은 건 맞다.
하지만 그는 재수 없는 시대를 만난 인간이었다.
엎혀서 왕이 된 것 차치하고 집권 초반기 10년은 내내 전쟁통에 시달렸으며, 그런 전쟁이 잠잠해질 무렵에는 지진 공포가 엄습한 시대를 살았다.
죽을 때 정신이 있었다면 그는 그랬을 것이다.
난 왜 이리 지질이 복도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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