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지질이 복도 없고 재수없는 시대를 살고 간 고려 현종 왕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9.
반응형

이리 생겼다고? 현종이?



고려 제8대 임금은 죽은 뒤에 받은 정식 시호가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이다.

현종은 묘호廟號라 해서, 죽은 뒤에 사당에 신주가 안치되면서 얻는 이름이니 그는 생전에 그가 이런 이름을 얻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생전 업적에 따라 신하들이 논의해서 후임 왕한테 올리면 크게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게 확정한다. 

그는 태조 왕건 손자라 당연히 성씨는 王이다. 이름은 순詢이라 풀네임은 왕순王詢이다.

보통 18세 무렵 어른이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는데 이를 자字라 해서, 이때부터는 보통 이 이름으로 행세한다. 사람들이 그런 이름으로 불러도 시례가 아니다.

다만, 왕순은 성인이 될 무렵에 안세安世, 곧 세상을 평안하게 했다는 자를 얻기는 했지만, 자로도 일컬을 수 없었다. 왜? 왕이니깐. 

그는 왕건 손자라 하지만 왕위계승권에서는 한참이나 멀어진 떨거지였다.

그런 그가 용케도 대권을 휘어잡았으니, 이것도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중이 되어 이곳저곳 떠돌다가 어느날 너 오늘부터 왕 해라! 해서 느닷없이 엎혀서 왕위에 앉았으니 말이다.

992년 8월 1일에 태어난 그가 왕위에 엎혀서 간 때가 1009년이니, 18세, 윤석열 나이로 17세 때 일이었다. 

하도 비상시국이라, 또 이미 18세면 성인이라 해서 수렴청정이 보통은 없다.

다만 현종의 경우 수렴청정을 한다 해도 당시 이를 할 만한 왕실 할매도 모조리 사라진 뒤였다. 싹쓸이 판에 그냥 무혈입성한 것이다.

그걸 할 만한 천추태후도 아들 목종이 강조의 칼에 목이 달아나면서 같이 쫓겨나 유배길로 갔다가 영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러니 이 어린 친구가 어느날 느닷없이 까까머리도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너 왕 해! 하는 말을 듣고는 용상에 올랐으니 나라꼴이 말이 되겠는가?

하지만 모로 가건 바로 가건 서울만 가면 된다. 그렇게 앉아서 22년 간이나 왕 노릇 하시다가 1031년에 갔다.

이후 고려 왕조는 영원히 현종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줄줄이 깐 자식 중에 물경 셋이나 차례로 왕위에 앉았기 때문이다. 

맏이 왕흠王欽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정실과 총애를 다투는 것으로 그려진 김은부의 딸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훗날 죽고 나서 덕종으로 칭해지는 고려 9대 왕이고,

그가 비실비실하다 죽자 또 다른 원성왕후 소생이 왕위를 이으니 그가  제10대 국왕 정종靖宗이라, 이가 고려 최대 성군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다시 그 후사는 왕휘徽한테 이어지니 바로 문종이라, 이가 형 정종과 더불어 고려 전성기를 구가한 절대 성군이다.

이 친구는 원혜왕후 소생이라, 바로 김은부의 다른 딸로서 원성왕후 동생이다. 김은부는 아예 세 딸을 모조리 헌종한테 바쳐서 국구國舅가 된다.

하긴 그러고 보면 현종 이후 고려 왕실에는 김은부 피가 흐른다. 

왕순은 22년이라는 만만치 않은 기간을 재위했지만 죽을 때 불과 40세, 만 39세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왕조도 왕은 향년이 40대가 보통인데, 간단하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업무 스트레스가 극심하고 필드 나가 골프채 잡을 시간도 안 주고 신하들이 졸라 닦아세우기만 하니 나 같아도 그냥 죽고 만다. 그래서 왕들은 거개 다 일찍 갔다. 

고려사절요 찬자들은 왕순을 일러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였으며, 배움에 있어 명민하고 문장에 뛰어났다"고 평하거니와, 글께나 읽은 건 맞다.

하지만 그는 재수 없는 시대를 만난 인간이었다.

엎혀서 왕이 된 것 차치하고 집권 초반기 10년은 내내 전쟁통에 시달렸으며, 그런 전쟁이 잠잠해질 무렵에는 지진 공포가 엄습한 시대를 살았다. 

죽을 때 정신이 있었다면 그는 그랬을 것이다. 

난 왜 이리 지질이 복도 없는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