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백제를 들이칠 때 동원한 군사는 물경 5만이었으니 이런 대규모 군사 동원은 기원전 57년 혁거세에 의한 신라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그 구성 내력을 보면 어중이떠중이 집합소였다. 그 총사령관 김유신은 백전노장, 신출귀몰했지만 이 어중이떠중이는 골차 아프기 짝이 없었으니
덩치만 큰 코끼리 하마 기린이었지 날렵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어 쪽수는 오천밖에 되지 않으나 해병대 udt 같은 훈련을 받고 상명하복이 철저한 계백이의 치고빠지기에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다.
황산에서 만나 네 번 접전했다가 네 번 내리 패한 김유신은 패인 분석에 골몰했으니 그 문제가 바로 쪽수 덩치에 있음을 절감하고는 계백이의 강점을 그대로 파고들었으니
오천으로 오만을 맞선 그 전술을 뒤집어 희대의 전술을 개발하는데 이는 그 자신이 그보다 삼십년 전에 낭비성 전쟁에서 시도한 바로 그것이었다.
고구려 대군에 맞서 패색이 짙던 그 순간 영관 장교 김유신은 단기필마로 고구려 진중으로 뛰어들어 비호처럼 날아서 역시 영관급인 고구려 장수 한 명 목을 번개처럼 내려치고는 그 목을 잘라 진중으로 다시 쏜살 보다 빨리 날아드니 기진맥진하던 신라 진영은 아연 화려갈채 박수를 보내니 그 모습을 보고는 너희도 나를 따르라 하고는 졸개들 이끌고 고구려 진중을 휩쓰니 고구려군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졌다.
황산벌에서 이를 떠올린 김유신은 울트라 수퍼미니멀리즘이라는 카드를 꺼냈으니 그것이 바로 가미가제식 폭격이었다.
오천에 맞서 단 한 명을 내세웠으니 오만에 맞선 오천에 대한 처절한 보복 응징이었다.
약발을 높이고자 그 단 한명으로 잘나가는 놈만 골랐으니 친조카이자 사위로 신라군 넘버투인 김흠순 아들 반굴을 골라 희생케 하고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아 신라군 넘버 쓰리 김품일의 아들 관창을 돌진케 한다.
이 감량주의 미니멀리즘 전략은 보란 듯이 성공해 계백의 오천 군대는 도륙을 면치 못했다.
계백이 오천 명에 김유신이 오천으로 맞섰더래면 그 전투 결과는 1차전으로 신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김유신은 그런 사람이며, 계백은 그런 김유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김유신이 초장 네 번을 내리 패한 것은 지나치게 많은 쪽수 때문이었다.
이 감량주의 전통은 이후 전개될 나당전쟁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데 수십만 자랑하는 당나라 군대는 몇명 되지도 않은 신라군에 쑥대밭이 되어갔다.
백만? 그 백만 쓰러뜨리기는 오천 계백이 군대 도륙하기보다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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