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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김천 섬계서원(金泉剡溪書院)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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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계서원(剡溪書院)

1. 문화재지정(文化財指定)

섬계서원(剡溪書院)은 2007년 12월 31일 경상북도지방문화재기념물(慶尙北道地方文化財記念物) 제160호로 지정(指定)받았으며, 경내(境内)에 있는 수령樹齡 500년 이상된 노거수(老巨樹) 은행나무는 국가지정천연기념물(國家指定天然紀念物)로 1982년 11월 4일에 지정(指定)되어 보호(保護)받는다.


2. 위치

소재지 :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445-1
김천 시내(金泉市内)에서 거창 방면(居昌方面) 30km 지점 가례(加禮)에서 봉곡사,鳳谷寺) 가는 쪽 2km 지점에 있다. 서원이 있는 양지(陽地)마을 북(北)으로는 비봉산(飛鳳山)이 있고, 거기에서 흐르는 섬계천(剡溪川)이 서원 앞을 지난다.


3. 창건(創建)과 복원 경과(復元經過)

본원(本院)은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위하여 순절(殉節)한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동시 순절하신 그의 장남(長男)으로 거창현감(居昌縣監)과 양지현감(場地縣監), 그리고 영월군수(寧越郡守) 등을 역임한 여병제(如瓶齊) 현석공(玄錫公)을 배향(配享)한 사묘서원(司廟書院)으로 선생이 신원복관작(伸寃復官爵)된 후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24년 뒤인 순조(純祖) 2년(1802), 그를 배향한 서원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건되었으나, 고종(高宗) 5년(186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어 그 자리에 원허비(院墟碑)를 세웠다.


1899년에 강당인 경의제(景毅齊)를 세우고 1959년에 지방유림 이만영(李晩永)·박원동(朴元東)·이현돈(李鉉敦) 등이 각지 유림(儒林)에게 재건(再建) 호소문을 보내고 본손(木孫)인 김연식(金淵植)·김필권(金弼權)·김철규(金晶士)·김석규(金錫圭)·김정연(金貞淵)·김정수(金正洙) 등이 전국을 순회 모금하여 1961년에 본당(本堂)인 세충사(世忠祠)를 복원했지만, 동별묘(東別廟)는 복원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세충사에만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향배(享配)해 오다가 1995년에 도비(道費) 5천만원을 지원받아 1996년에 동별묘(東別廟)를 복원했다.

동별묘에는 기거주 지의주사(起居住知宜州事)인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 선생과 그의 제자인 참봉(參奉)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와 사윤(司涓) 남계(南溪) 서즐(徐騭) 삼현(三賢)을 모신다.



4. 봉향위 약력(奉享位略歷)

(1)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선생

선생은 관조(貫祖) 김녕군(金寧君) 휘諱 시흥(時興)의 7세손인 호조판서(戶曹判書) 퇴휴당(退休堂) 휘(諱) 순(順)의 손자(孫子)이며, 8세손 증영의정(贈領議政) 휘諱 관(觀)의 맏아들로, 1399년 2월 16일 지금의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백지리(白池里)에서 출생했다.  초휘(初諱)는 효기(孝起)지만, 과거(科擧)에 합격한 후에 장인인 김효성(金孝貞)을 피휘避諱하여 문기(文起)로 개명(改名)했다.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또는 마암(馬巖)이다.

선생은 십여세 때 어머니 옥천 육씨(沃川陸氏)가 돌아가자 십여리나 되는 그 산소에 매일같이 성묘를 다녔다. 성품이 악을 미워하셨고, 말씀을 잘 하셨으며, 기우가 굉대하셨다.


세종(世宗) 8년(1426)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자 곧 아버지 휘 관(觀)이 세상을 떴으므로 관직에 나아가는 일을 미루고, 아버지 산소에서 3년간 시묘(侍慕)를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공의 마을을 효자동(孝子洞)이라 불렀다.


시묘를 마친 후 세종 11년(1429)에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을 시작으로,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과 경상도아사(慶尙道亞使)를 거쳐, 세종 23년(1441)에는 경참부소윤(慶昌府少尹)이 되어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와 문과시관(文科試官)도 겸임하였는데, 이때 왕명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頒布)를 앞둔 그 마지막 해석(解釋) 사업에도 참여했다.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겸 지병조사(兼知兵曹事), 병조참의(兵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등을 역임하고, 이때 병약한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端宗) 보호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문종 1년(1451)에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갔다. 남들이 다 반대하던 둔전법(屯田法)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올렸으므로 문종으로부터 친히 쓰신 칭찬의 글을 받았다.

단종(端宗)이 즉위한 이듬해인 단종 1년(1453)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다시 중앙 조정으로 복귀했다.  



이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 영의정(領議政) 황보 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領議政)이 되는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그 무렵에 함길도절제사(威吉道節制使) 이징옥(李澄玉)이 필사적인 저항을 일으키자 선생을 함길도병도설세사(戓吉道兵馬都節制使)로 임명하였다.

선생께서 채 임지(任地)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징옥은 종성부관관(鍾城府判官) 정종(鄭鍾)한테 피살되었으므로 임지에 도착하신 선생께서는 그 뒷수습에 진력하였다.


단종(端宗) 3년(1455) 윤 6월 11일에 영의정이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는 정변(政變)을 또 일으켰다.

이때 함길도에서 단종 폐위 소식을 든고 쓴 선생의 방백한시(放白鷴詩)는 단종에 대한 선생의 단심(丹心)이 잘 나타난다. 왕이 된 세조(世祖)는 곤 선생을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삼군도진무 (三軍都鎭撫)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한양(漢陽)으로 돌아온 선생은 세조 1年(1456) 6월 1일에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迎接)하는 잔치를 베풀게 되었다. 선생은 이날 현장에서 세조를 베고 단종을 복위시키는 거사(擧事)를 하기로 동지(同志)들과 결의하였다. 현장 책임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에게 맡기고, 운검(雲劒)인 성승(成勝), 박쟁(朴崝), 유응부(兪悳孚) 등은 세조를 베며, 선생 자신은 군(軍) 동원과 명신(明臣)들의 회유(懷柔)를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일에 돌연 운검(雲劒)을 폐(廢)하는 조치(措置)가 있었으므로 부득이 거사를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 동지였던 김질(金礩)의 밀고(密告)로 모의가 탄로되어 동지들과 함께 선생도 체포되었다. 선생은 단종 복위를 빙자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것이라는 자백을 강요받고, 그렇지 않다고 부인한 말 이외는 홀로 끝까지 입을 다물어 불복하고 6월 8일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절하였다. 이때 선생의 맏아드님 여병재공(如瓶齋公) 휘 현석(玄錫)도 사형되었고 휘 충립(忠立) 이하 손자들은 모두 상주(尙州) 관아(官衙)의 노비(奴婢)로 정속(定屬)되었으며, 공의 배위(配位)의 며느리와 딸들은 모두 고관들의 노비로 보내졌다.


숙종(肅宗) 24年(1698) 11월 6일에 단종(端宗)이 복위(復位)되고, 영조(英祖) 7년(1731)에 마침내 선생의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가 내렸다.

그러자 영월(寧越) 충신단(忠臣壇)을 비롯하여 종가(宗家)에는 부조묘(不祧廟)가, 공주公州 동학사 초혼단이, 김천(金泉)에는 섬계서원(剡溪書院)이, 고향 옥천(沃川)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시흥(始興)에는 오정각(五旌閣)이 이어 건립되고, 영동(永同, 당시는 옥천현)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배향되는 등 공을 추모하는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이 의성 덕양서원(德陽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20여 곳에 이어 건립되었다.

그리고 정조(正祖) 2年(1778)에는 공께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내리고, 정조 5年(1781)에는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提大提學), 세손이사(世孫贰師) 등의 증직(贈職)이, 정조 15年(1791)에는 불천위(不遷位)가, 고종(高宗) 7年(1870)에는 충신정려(忠臣旌閭)의 왕명이 내렸다.

1977年 9月22日字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결의에 따라 1978年 5月 18日 사육신묘역에 선생의 가묘(假墓)를 봉안하고, 사육신공원 의절사(義節祠)에 선생 위패(位牌)를 모셨다. 2004년 7월 16일에 노량진 선생 묘 아래에 「사육신 김문기 선생기념관」을 건립하고 영정을 모시는 한편 사육신현장비를 세웠다. 


(2) 여병재 김현석 생애(如甁齋金玄錫先生生涯)

先生은 충의공(忠毅公) 휘 문기(文起)의 맏아들로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沃川郡伊院面白池里)에서 출생하였는데, 字는 태초(太初), 호는 여병재(如甁齋)다.

先生은 본성이 강직(剛直)하고 효성이 지극하더니 세종 30年(1488)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일찍이 거창현감(居昌縣監), 영월군수(寧越郡守) 등을 역임했는데, 어디를 가나 덕으로 다스리며, 학문(學問)과 농사를 장려하여 맑은 목민관(牧民官)으로 추앙받았다. 

특히 거창(居昌)에서는 사장(社倉) 제도를 잘 운영해 어려운 백성들을 많이 구하였으므로 사적비(事蹟碑)가 서고, 영윌(寧越)에서는 향약(鄕約)을 권하고 효자(孝子)와 열녀(烈女)를 찾아내어 표창(表彰)하는 등의 덕을 베풀었으므로 문종(文宗) 2년(1452)에 칭덕비가 섰다.


세조 2년(1456)에 단종 복위(復位)에 아버지가 연루되자 공도 사형을 받았다.

영조(英祖) 7년(1731)에 아버지 휘 문기(諱文起)가 복관작愎官爵) 되셨으므로 先生도 정조(正祖) 15년(1791)에 왕명(王命)으로 영월(寧越) 장릉 충신단(莊陵忠臣壇)에 배향(配享)되고, 고종(髙宗) 7년(1870)에는 충신정려(忠臣旌閭)의 왕명과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 증직(贈職)을 내리었다.


5. 동별묘 삼현(東別廟三賢)

장지도(張志道) 선생은 옥산인(玉山人)이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 지례(知禮)에서 태어나 호〔號)를 반곡(盤谷)이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진사문과(進士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이 기거주지 의주사(起居注知宜州事)에 오르고, 조선이 건국하자 소감(少監)에 을라 태조(太祖)의 명으로 전리좌랑(典理佐郞) 정혼(鄭渾)과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주(校註)하기도 한 학자(學者)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정치적 혼란과 정권을 둘러싼 골육적(骨肉的) 참극을 목도(目睹)한 나머지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숨어버렸다.


선생은 낙향(落鄕) 후 육영(育英)에 현신하며 지례(知禮)를 향토 학계 선구적 지방으로 만들고 문풍(文風)을 쇄신하여 도의(道義)를 진작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다. 그중에서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오는 대효자(大孝孒) 남계(南溪) 서즐(徐騭)과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 같은 특기할 만한 제자가 있다.

이들의 효행(孝行)이 국사國史에 오름으로써 향토 도의심(道義心) 앙양昻揚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딘 것이다.


사후(死後)에 후사(後嗣)가 없었으나, 위 제자들에 의해 자식 못지 않은 상제의(喪祭義)에 효성(孝誠)을 받기도 했다. 유허비(遺墟碑)가 지례(知禮) 들머리에 섰고, 삼효정려(三孝旌閭) 장지도(張志道) 서즐(徐騭) 윤은보(尹股保)가 세종조(世宗朝)에 내려 정려각과 유허비(遺墟碑)가 나란히 서 있다.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 선생과 남계(南溪) 서즐(徐騭) 선생 

장지도(張志道)의 두 제자 절효(節孝) 파평인(波平人) 윤은보(尹殷保)와 남계(南溪) 이천인(利川人) 서즐(徐騭)은 후사(後嗣)가 없는 스승을 어버이처럼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섬기고 스승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했다.


시묘살이 중에 윤은보(尹殷保)의 부친이 병으로 눕자 간병하고 병이 낫자 시묘(侍墓)하고 부친이 들아가자 부친묘에 시묘하면서도 삭망(朔望)에는 스승의 묘를 찾았다. 서즐(徐騭)은 스승의 대상일(大祥日)에 폭설로 길이 막혀 제수를 차리지 못하게 되자 불효를 통탄하고 통곡(痛哭)하니 호랑이가 노루를 물고와 제수를 장만하게 되었다.

또 서즐은 양친상을 당하자 6년을 시묘(侍墓)살이 하니 1432년(세종 14)에 정려(旌閭)가 내렸다.

김천(金泉)에서는 가장 오래된 졍려각(旌間閣)으로 현판(懸板)에는 절효위사후 능참봉윤은보지분(節孝爲師厚陵參奉殷保之門)이 좌편에 걸렸고 우편에는 남계위사사윤서 즐지문(南溪爲師司涓徐騭之門)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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