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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페르시아 문화탐방> ③ 조로아스터가 남긴 유산들(2008)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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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만에 새로 쓰는 페르시아 문화탐방기 (3) 



 [2008.02.24 송고]


<페르시아 문화탐방> ③ 조로아스터가 남긴 유산들

과거 위광 사라졌지만 살아있는 종교로 성지 유지  


(야즈드<이란>=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꺼져가는 불꽃 조로아스터(Zoroaster)에 다시 심지를 돋운 이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차라투스트라(Zaratustra)라는 이름으로 그를 관속에서 불러낸 니체는 이렇게 선언했다. 


"신은 죽었다." 



차라투스트라. 조로아스터라고도 한다. 야즈드 배화교 사원에 봉안한 이 상은 어쩐지 인도인 풍모가 난다.



기원전 600년 이전에 활동했을 조로아스터는 아마도 인류역사상 최초의 종교 창시자일 것이다.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는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특히 숭배한다 해서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번역한다. 


조로아스터가 태어나 활동한 곳이 페르시아이고 이슬람교가 침투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까닭에 현재도 이란 곳곳에는 그 흔적이 적지 않다. 



조로아스터교를 불을 숭배한다 해서 배화교拜火敎라 할 정도로 꺼지지 않는 불은 중요하다. 야즈드 배화교 사원에서 꺼지지 않는 불.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신봉하다시피 한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 페르세폴리스에 남은 부조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었다. 이어 이곳에서 북동쪽 6㎞ 가량 되는 지점 황량한 사막지대에 우뚝 솟은 바위산에 형성된 나크시-에 로스탐(Naqsh-e Rostam) 유적에서도 조로아스터교의 강고했던 전통을 만날 수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시대 왕가의 공동묘지 나크시-에 로스탐(Naqsh-e Rostam)



로스탐은 전설적인 제왕으로 나크시-에 로스탐은 로스탐의 그림 정도를 의미한다. 멀리서 이 유적을 조망하면 석굴사원에 온 듯한 착각을 준다. 수십m 되는 암벽 중턱을 따라가며 十자 모양으로 표면을 깎아내고는 그 정중앙을 방형으로 구멍을 뚫어 무덤 4기를 나란히 조성했기 때문이다. 



나크시-에 로스탐(Naqsh-e Rostam)의 어느 왕묘



그 무덤들이 자리잡은 곳은 지표면에서 대략 10m 지점은 될 듯 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암벽 깎기를 했을까? 아니면 요즘 고층건물 겉벽을 청소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암벽 위에서 밧줄을 내려 대롱대롱 매달려 작업했을까?  


무덤 4기의 주인공은 왼쪽부터 차례로 크세르크세스(혹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혹은 크세르크세스), 그리고 다리우스 2세라 하지만, 이 중 다리우스 1세 무덤만 확실하다. 다른 무엇보다 이곳에만 무덤 주인공을 밝혀주는 명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크시-에 로스탐(Naqsh-e Rostam)



저처럼 무덤을 조성한 것은 도굴 방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무덤은 이미 오래 전에 모두 도굴됐다. 


十자형 묘실 표면 위에는 예외 없이 아후라 마즈다 신상(神像)과 불꽃 문양을 세트처럼 장식해 놓았다. 이 둘은 모두 조로아스터교의 짙은 영향력을 감지케 하는 것으로, 전자는 우주 창조의 절대신이며, 후자는 그 상징이다. 조로아스터교를 왜 배화교라고도 하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는 부조인 셈이다. 불꽃 문양은 백제금동대향로를 새겨 놓은 듯한 착각을 갖게한다.   





페르세폴리스나 나크시-에 로스탐이 조로아스터교가 가졌던 과거의 영광을 증언한다면 시라즈를 출발해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450㎞ 가량을 달려간 이란고원 중부에 위치한 도시 야즈드는 그 종교가 단순히 과거에만 그치지 않고 현대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대는 생물체임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탐방단이 처음으로 찾은 곳은 조로아스터교 묘지. 멀리 험준한 산들을 병풍처럼 두른 드넓은 평야지대 중에서도 야트막한 민둥산 기슭을 낀 이곳은 높이 2m가 될까말까 한 벽돌담장으로 외부와 차단시켜 놓았다. 너무 일찍 도착했기 때문인지 연락을 받은 이곳 관리인이 탐방단보다 늦게 나타나면서 제주도 조랑말 만한 나귀 1마리를 끌고 나왔다.  


야즈드 배화교 공동묘지



이곳 입구의 간판에는 영어로 'Zoroastrian Cemetery in Yazd'(야즈드 조로아스터교 묘지)라고 적어 놓았으나 실제는 기슭에 위치한 조로아스터교 사원 유적과 그 뒤편 민둥산 두 꼭대기에 나란히 원통형 벽돌 탑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장례식장이 세트를 이룬 이른바 '복합공간'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장례식장은 조망하기만 했을 뿐 현장을 밟아보지는 못했다. 



배화교 공동묘지



현재는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이 벽돌탑은 '침묵의 탑'이라 일컬으며, 과거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조장(鳥葬)이라고 해서 시신을 그대로 외부에 노출시켜 놓고는 새들이 뜯어먹게 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기 위한 곳이라고 한다. 이런 시설로 두 곳을 마련한 까닭은 시신을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해 처리하기 위함이라 한다. 




조장처 전면에 위치한 조로아스터 사원은 폐허라 무너진 벽돌이 곳곳에 나뒹구는가 하면 심지어 못쓰게 된 트럭이 버려져 있기도 했다. 전면에서 보면 장방형 벽독 건물로 그 복판을 관통하는 아치형 통로를 마련해 놓았으며 그 통로 중간쯤 지붕에는 원형 구멍을 뚫어놓았다. 불을 피울 때 나는 연기를 빼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야즈드 시내에 자리한 아테시카데(Ateshkadeh) 사원은 살아있는 조로아스터교 교회다. 사원은 앞에서 볼 때 정방형의 아담한 단독 벽돌건물로 그 앞에는 원형 연못을 만들고 물을 채워 놓았는데, 탐방단이 찾았을 때는 물이 얼어 있었다.  



야즈드 배화교 사원



건물 전면 중앙 지붕 쪽에는 날개를 양쪽으로 활짝 펼친 채 오른쪽을 향해 돌아선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신상 장식물을 걸어 놓았다. 허리춤에는 마치 훌라후프 같은 큰 고리를 둘렀으며, 왼손에는 그 4분의 1 정도 크기인 작은 고리 하나를 쥐고 있다. 고리란 서로를 이어주는 것이니 신과의 약속을 상징할 것이다. 


사원 입구 오른쪽에 붙은 영어 설명문을 보니 이 사원은 1934년 인도의 조로아스터 교인들이 건립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뒷벽 한 가운데 유리벽으로 차단한 공간에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불이 활활 타고 있다. 이 불은 대략 서기 470년부터 타기 시작해 이후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 나히드-에 파르스(Nahid-e Pars) 사원이란 곳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배화교의 불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배화교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불은 나무를 태워 피우고 있었다. 벌건 불기를 머금은 나무와 그 결을 보니 아무래도 참나무 숯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살구나무나 아몬드 나무를 주로 쓴다고 했다. 역시 이곳에서도 화력을 유지하기 위해 견과류 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불을 유지하기 위해 야즈드 시 정부는 가스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하나 사원측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 불이 꺼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는 것이다. 





왜 인도인들이 이곳에다가 조로아스터 교회를 세웠을까? 이 종교 신도는 전 세계적으로 약 1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중 인도가 8만명 정도를 차지한다. 야즈드 현지의 신도 숫자는 1만5천명. 과거 조로아스터교가 누린 위광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인도의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그들의 종교 성지인 야즈드를 잊지 않고 이곳에다가 사원을 건립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원 안에 걸린 조로아스터 초상화는 인도인 색채가 매우 짙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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