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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페르시아 문화탐방> ② 하마스 테러와 페르세폴리스 점토판(2008)

11년만에 다시 쓰는 증보개정판 페르시아 문화탐방기 (2)  


2008.02.24 08:05:03


<페르시아문화 탐방> ②하마스 테러와 페르세폴리스 점토판

세계문화유산 '만국의 문' 훼손한 낙서에 한글 이름도 한몫 


(시라즈<이란>=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페르시아만을 따라 이란 남부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자그로스 산맥이 펼친 초원지대에 위치한 시라즈. 테헤란에서 1천㎞ 가량이나 떨어진 까닭에 탐방단은 비행기를 이용했다. 한데 비행기는 정해진 출발시간보다 1시간 반 가량이나 늦게 떴다. 이란 체류기간에 경험한 일이지만 중국인을 특징짓는 이른바 '만만디'는 이란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었다. 






해발 1천500m 고지에 위치한 시라즈는 이란에서는 남쪽에 치우친 파르스 주(州)에 위치한 까닭에 가로에 심어진 야자수들이 동남아에 온 듯한 상념을 잠시 주기도 하지만, 고원지대여서인지 날씨는 매섭다. 인구 120만으로 이란에서는 6위의 대도시라 하지만, 천만 도시 서울에 익숙한 한국탐방단원들에게는 농촌이나 마찬가지다. 



쉬라즈 야경


쉬라즈의 아침



잔드 왕조(1747~1779) 수도일 당시에 그 군주 카림 칸이 만들었다 해서 '카림 칸 요새'로 일컫는 성곽은 벽돌로 구축한 성벽이 특히 장관이다. 높이 14m에 이르는 성벽이 평면 방형으로 둘러친 이 성곽은 요새라는 명칭답게 규모는 아담한 편이라 면적은 4천㎡ 정도였으며, 성벽 네 귀퉁이에는 각각 망루와 같은 탑을 세워 놓았다. 이상한 점은 정면 왼쪽 탑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곳 안내를 맡은 현지 학자에 의하면 지진으로 인해 기울어졌다고 한다. 



카림 칸의 요새 성벽 외곽


기울어진 카림 칸의 성벽


카림 칸의 요새 모서리 망루


카림 칸의 요새 내부



시라즈 시내를 막 벗어난 북서쪽 외곽에 위치한 이 요새를 둘러본 다음 이번 페르시아문명 탐방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란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라즈 북동쪽 70km 지점에 위치하는 이 고대 유적지는 이미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력만큼이나 장관을 이뤘다. 


페르세폴리스 원경

만국의 문



하늘을 향해 죽죽 솟은 돌기둥은 비온 뒤 한창 솟아나기 시작하는 죽순을 연상케 하며, 페르시아 제국 군주가 이곳으로 조공품을 들고 온 만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입구였다는 '만국의 문'(the Gate of All Nations)은 비록 목재였을 지붕은 망실되고 없으나 그 우람한 자태는 2천년 이상 훨씬 지난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페르세폴리스 정문인 '만국의 문'으로 오르는 계단.



그렇지만 유적 관리는 허술한 편이라 '만국의 문' 곳곳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낙서가 발견된다.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한국어 낙서도 있을 것 같아 심심풀이로 훑어보았더니, 이내 큼지막하게 긁어 놓은 한글 이름이 발견됐다. 현재 이곳은 복원사업이 한창인 듯, 곳곳에 붕괴된 건축 부재를 올리기 위한 비계 시설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벽면 같은 시설 곳곳에는 현대에 들어와 땜질했음이 분명한 보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만국의 문 각국 낙서

만국의 문 한국어 낙서 '은수 짱'



'만국의 문'


'만국의 문'



전면으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지는 산 기슭에 거대한 궁전시설인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 최고권력자들은 산은 깎아내는 대신, 그 앞 낮은 대지를 축대로 쌓고는 흙이나 돌로 채우는 방식을 구사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평면 장방형에 가깝다. 이렇게 쌓아올린 축대는 서쪽을 기준으로 할 때 5~13m에 이르며, 면적은 축대 내부만 12만5천㎡에 이른다. 



돌기둥만 남은 만국의 문



하지만 축대 내부가 축구장처럼 완전한 평면을 이루는 것은 아니어서 이 왕궁 뒤편 산 중턱에 올라 유적을 한 눈에 조망하면 구역별 차이가 환연히 감지된다. 그 중 한 구역에서는 꽤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건물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주춧돌이 행렬을 이루어 지표면에 노출돼 있었다. 아마 발굴조사를 거쳐 이렇게 복원되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경주 황룡사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만국의 문' 안쪽에 새긴 쐐기문자



페르세 '폴리스'라는 이름, 죽죽 솟은 돌기둥을 보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시대 원형 극장을 갖춘 폴리스를 떠올리게 되며, 나아가 일정 부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지 않은 차이가 관찰된다. 무엇보다 그리스ㆍ로마 건축양식이라면 이오니아식이니 코린트식이 하는 기둥 장식을 떠올리게 되지만, 페르시아 제국이 주로 연희 같은 특별한 행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축조했다는 이 페르세폴리스에서는 그런 양식을 찾을 수 없다. 



페르세폴리스 전경



현장을 찾은 우리에게 특히나 인상적인 사실은 곳곳에서 연꽃 문양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양을 장식한 유물을 그대로 경주에 옮겨다 놓으면 많은 미술사학자가 신라시대 불교미술품이라고 착각할 만한 도안이다. 




주초



조공행렬


조공행렬




이 도시를 뒤편에서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는 암벽을 직각에 가깝게 깎아낸 다음 그 중앙을 뚫어 마련한 석굴이 자리한다. 언뜻 보면 한국 불교미술에서 흔한 마애불상 같기도 하며, 중국에서 만개한 윈강석굴이니 하는 석굴사원을 연상케 하지만 실은 페르시아 제국시대 제왕의 무덤이다. 언덕을 올라 이 무덤을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아치형으로 파고들어간 석굴 중앙에는 마치 누에고치를 반토막으로 자른 것 같은 석관이 놓여 있다. 한데 그 오른쪽에 깨진 흔적이 있고 그것을 땜질한 부분도 있다. 그 땜질한 부분에는 '11-5-1967'이란 숫자를 새겨 놓았다. 아마도 1967년 11월5일에 보수한 부분이라는 의미일 터이다. 



페르세폴리스 언덕 뒤편 페르시아제국 어느 왕의 무덤


그 석굴과 관


석관 보수 흔적



이곳 페르세폴리스 유적 한쪽에는 전시관이 따로 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이 유적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압축적인 전시가 소규모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런 전시관에서 또 우리의 문화유산이 처한 현실이 오버랩됐다.  



페르세폴리스 출토유물



유적지 안에다가 이런 전시관 혹은 박물관을 세운다고 하면, 아마도 문화유산 시민운동 단체나 원형 고수를 주장하는 관계 학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맹렬한 반대 운동을 펼칠 것이다. 문화유산을 파괴하면서 무슨 전시관이냐고 삿대질을 해 댈 것이다. 황룡사 전시관이 그랬고, 석굴암 모형 전시관이 그랬다. 이들 모두가 추진 단계에서 반대운동에 좌초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이 페르세폴리스 전시관이 더욱 놀라운 점은 현장 유적을 그대로 활용해 건축물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시관 벽면 일부는 실제 유적이다. 이런 식으로 국내에서 전시관을 세운다면? 결말은 보지 않아도 선하다. 





이곳 전시실을 안내하던 이란 현지 가이드 다라비 씨는 쐐기문자(설형문자)를 촘촘히 새긴 점토판 유물을 가리키면서 대뜸 미국 이야기를 꺼냈다. 얘기인즉, 미국인들이 오래 전에 이곳 페르세폴리스를 발굴해 12만장에 이르는 점토판을 판독 및 연구하고 나서 돌려주겠다고 해 놓고는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에 대한 이란인들의 감정이 더욱 좋지 않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곡절이 더 있을까?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약탈을 방불하는 무차별적인 유물 수집을 통해 현재의 박물관 컬렉션을 채웠다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님에도 왜 점토판 때문에 이란-미국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은 이번 탐방이 끝날 무렵 테헤란으로 복귀해 만난 이란 고고학연구소장 하산 파젤리 박사를 통해 풀 수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왼쪽 다리를 잃어 의족에 의지하는 파젤리 박사는 작년 11월에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이란 고고학 성과를 발표했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가 약 두 달만에 테헤란에서 재회한 것이다. 


이 점토판 문제를 언급하면서 파젤리 소장은 뜻밖에도 팔레스타인 급진 무장조직으로 알려진 하마스를 언급했다. 그에 의하면 1997년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벤 예후다 몰 폭탄 테러로 미국인 희생이 컸다. 5명이 죽고 192명이 다쳤다. 이에 희생자측은 미국 국내 법원에 이란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 결과 이란 정부는 4억2천35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하마스에 의한 테러 사건에 왜 미국인은 이란을 피고로 지목했을까? 그것은 이란이 하마스를 배후에서 지원한다고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법률상식으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지만 어떻든 미국 희생자들은 이 법률소송에서 승리했다. 


한데 문제는 또 남았다. 호메이니 혁명 이후 국교가 단절된 이상 배상판결을 받았다고 한들 이란 정부에서 배상금을 받아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모순에 봉착한 희생자측은 바로 페르세폴리스 유적에서 출토된 점토판 유물을 주목했다. 이 점토판들은 1930년대 시카고대학 동양연구소에서 발굴한 것으로 현재 소장처 또한 이곳이다. 파젤리 소장에 의하면 아직까지 이란에 반환되지 못한 점토판은 12만점이 아니라 약 7만점 정도라고 한다. 





어떻든 폭탄테러 희생자측에서는 이 점토판 유물들을 압류해 그것을 경매에 부쳐 배상금을 받아내려 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시카고대학 동양연구소는 미묘한 위치에 처하게 됐다. 그렇지만 이 연구소는 이런 식으로 자기네 견해를 정리했다. 첫째, 점토판 유물은 소유권이 이란에 있으며, 언젠가는 이란에 돌려주어야 한다. 둘째, 그 가치는 미국 헌법 원본 문서만큼이나 크다. 





연구를 위해 외국에 '빌려준' 자국 유물을 볼모로 삼아 그것을 경매에 부쳐 배상금을 받아내겠다는 미국인을 이란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또한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하다. 

taeshik@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