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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깐족대다 6년간이나 고려에서 억류생활한 거란 사신 지랄리只剌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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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고려거란전쟁 와중에 하공진이라는 고려 충신이 있었음을 보았거니와, 그와 비슷하게 상대 진영 고려에 전권특사로 갔다가 6년간이나 억류생활을 한 거란 조정 신하도 있다. 

이 일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 측 기록과 거란측 증언인 요사遼史에 모두 남아있지만, 문제는 단순히 표기가 다른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정체도 다른 듯한 느낌을 준다. 

이를 위해 위선 고려 측 기록을 본다.

그에 의하면 1013년, 그러니깐 거란에서는 성종 야율륭서 개태開泰 2년, 고려로서는 현종 4년 3월 17일에 거란에서 사신 으로 좌감문위 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야율행평耶律行平이라는 이가 와서 흥화興化를 비롯한 6개 성을 빼앗은 일을 질책하더니, 

같은 야율행평이 석달 뒤인 같은 해 1013년 7월 18일에 다시 고려에 나타나서 6성을 돌려달라 한다.

이 친구는 다시 2년 뒤인 1015년 4월 11일에도 거란 사신으로 다시 고려 조정에 나타나는데 이때는 그냥 장군將軍이라고만 했다. 요구 사항은 똑같아서 다시 6성을 돌려달라 한다.

한데 이때는 이미 고려 또한 잦은 거란 침략에 야마가 돌 때까지 돈 상태이며, 드루와 붙어주마 하던 때라 이번에는 아예 야율행평을 억류해 버렸다. 

같은 요구를 계속 일삼으니 야마가 돈 까닭도 있겠고, 또 거란에 사신으로 간 고려 사신을 억류한 데 대한 응징 차원도 있었을 것이며, 나아가 하도 깐족대니 더 열받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이런 야율행평이 고국으로 귀국한 시점은 놀랍게도 5년 뒤인 1020년 2월이다. 이때는 이미 귀주대첩이 지난 이듬해라, 양국 관계는 바야흐로 화해무드가 일기 시작한 때라

고려에서는 이때 이작인李作仁을 사신으로 보내 표문을 받들고는 예전과 같이 고려가 번국藩國이 되겠다, 그 징표로 공물을 바친다 하면서 그 화해 제스처로 그간 억류한 야율행평을 돌려보낸 것이다. 이는 고려사절요 쪽 기록인데, 고려사 현종본기에는 이 일이 한달 뒤인 3월 2일에 있었다고 적어 차이를 보인다. 

이 5년 동안 고려에서는 끊임없이 야율행평을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 이제 거란은 깨끗이 잊고 고려에서 일하자, 연봉도 두둑히 쳐 주고 이쁜 새마누라도 얻어주겠다 했지만, 끝내 거절하며 그는 거란에 충절을 지켰다. 

한데 이 일이 요사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등장한다.  

권15 성종본기6에 의하면 저 무렵 잦은 파견을 통해 고려 쪽에다가 이른바 강동육주 반환을 요청한 이는 야율자충耶律資忠으로 등장한다. 이 야율자충은 처음에 고려에 갈 때는 벼슬이 중승中丞이었지만, 나중에 갈 때는 상경부유수上京副留守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야율자충이 곧 야율행평인가? 고려 쪽 기록과 거란 쪽 기록이 모두 사실을 반영한다 할 때는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른다면 자충資忠과 行平은 본명과 字 정도 관계일 수 있다. 

한데 성종본기7을 보면 전연 사정이 달라져서 1020년 5월 경오庚午에 거란에서는 다시 야율자충耶律資忠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니 고려국왕 왕순王詢, 곧 현종이 표문을 올려 번국을 칭하면서 공물으로 바치는 한편 억류하고 있던 왕인王人 지랄리只刺里를 돌려보냈다고 했다. 

지랄리를 왕인王人, 곧 왕족(황족)이라 했으니 당연히 성씨는 야율이다. 이 야율지랄리를 지칭해 성종본기는  

지랄리는 고려에 6년을 머물면서도 충절을 굽히지 않으니, (그 정성이 갸륵하다 해서 황제가) 임아林牙를 삼았다.

고 했다. 

이로 보아 억류 당한 사람은 야율지랄리이며, 야율자충이 사신으로 고려를 자주 오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고려 쪽 기록에서는 뭔가 착란이 일어난 듯하다. 

그렇다 해서 야율지랄리로 대표하는 거란 사신이 깐족대다가 고려에 6년간(고려 쪽 기록에서는 5년간)이나 억류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지랄리는 이름이 참 지랄 맞다. 지랄을 떨다가 억류된 모양인데, 이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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