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에 현재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다
첫째 발굴비화..발굴단 일원인 조유전 선생이 일전에 이를 초抄한 적 있지만 이를 토대로 나는 2001년에 그 완결편 전초를 이미 선보였다. 작금 한국사회에서 통용하는 발굴 일화는 그때 15회 분량으로 정리한 내 기사가 뼈대다. 나는 발굴단장인 김원룡이 이 발굴을 자아비판했다 해서 그걸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외부에서의 진짜 충격을 그는 받은 적이 없다. 간담을 서늘케 하고 싶었다.
둘째, 설계자를 남조南朝 양梁나라 사람들로 확정했다. 이는 종래 梁官瓦爲師矣로 판독한 송산리 6호분 전돌 명문을 끌어엎음으로써 가능했다. 瓦는 어처구니없는 오독이었다. 나는 볼펜 똥으로 보아 그것을 쳐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 문구는 양나라 관리를 스승으로 삼았다가 되니, 그 설계자가 중국인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이 논문이 제출되고 조윤제가 瓦를 以로 바꾸어 읽는가 하면, 梁官을 梁宣으로 보아 이를 양나라 사람으로써 宣이라는 성씨를 지닌 인물로 읽었지만, 피장파장 결론은 버킹검이라 내가 이룩한 성과에 숟가락 하나 얹은데 지나지 않는다.
셋째, 무령왕릉 묘권墓券에 보이는 최대 난제인 '등관대묘登冠大墓'를 등관이라는 이름의 부여씨 왕가 공동묘지로 확정했다. '大墓'는 단순히 큰 무덤으로써 지금의 무령왕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 공동묘지라는 뜻임이 동시대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같은 大墓를 볼 적에 명명백백하다. 이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바뀔 수 없다. 이 논문이 제출된 이후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서는 주로 중문학계에서 2명이 연이어 이를 재검토하는 논문을 제출했지만, 이 또한 내 논문에 숟가락 하나 얹은데 지나지 않아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넷째, 묘권은 2장의 넓적한 정사각형에 가까운 판돌이라, 그 앞뒤에는 각각 성격이 조금씩 다른 문서 네 종류로 구성되니, 이들 네 페이지는 전체로써 완결성을 갖는 문서 한 건임을 확정했다. 그것은 그 첫페이지가 如左, 다시 말해 다음과 같다는 말로 끝나고, 그 마지막 4쪽 마지막 구절 역시 如左로 끝난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다시 말해 이들 문서 네 건을 따로따로 묘지석이니 매지권이니 방위표니 하는 따위로 구분한 자체가 어불성설임을 확정했다.
다섯째, 이 묘권 2장 4쪽짜리는 병풍처럼 접는 첩식帖式 문서임을 확정했다. 이를 해명할 때 최대 관건은 오직 마지막 문건, 다시 말해 종래에는 무령왕비 묘지석이라고 했던 그 문건이 왜 거꾸로 쳐박혀야 했는지를 이해하는 키가 된다. 왜 거꾸로 쳐박혔는가? 그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을 나는 해명했다. 이 또한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여섯째, 왜 무령왕과 그 왕비는 남북 장축인 이 전축분에서 머리를 북쪽에 두지 않고 남쪽을 향해야 했는지도 비로소 해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상하다고 고개만 갸우뚱할 뿐,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아무도 묻지 않았으니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를 내가 찾았다.
앞으로 더 무령왕릉에 매달릴지는 모르겠다. 이것이 지난 20년간 무령왕릉에 매진해서 얻은 성과라고 자평한다.
(2016. 3. 26)
***
이는 아래 졸저를 말한다.
직설 무령왕릉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김태식 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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