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6권 헌종 공상대왕獻宗恭殤大王 을해 원년(1095), 송宋 소성紹聖 2년·요遼 수륭壽隆 원년에 보이는 기술이다.
송 나라 상인 황충黃冲 등 31명이 자은종慈恩宗 승려 혜진惠珍과 함께 왔으므로, 근신近臣에게 맞이하여 보제사普濟寺(개성開城)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혜진이 항상 말하기를, “보타락산普陁落山 성굴聖窟(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을 보고자 하여 왔다" 하며, 가서 봤으면 한다고 요청했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허심한 듯한 이 대목이 나는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데
첫째, 낙산사라는 명성이 동시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는 사실이며
둘째, 그런 까닭에 그곳을 직접 답사 참배하고 싶다는 욕망을 동시대 중국 불교승려들한테도 부채질 했고
셋째, 하지만 그런 요청을 고려 왕조가 정중히 거절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첫째와 두번째와 관련해 관음신앙 본고장을 자처할 만한 낙산사와 어떤 통로를 통해 저리 알려졌을까 생각해 보면, 낙산사 개창주인 의상이 누리는 명성에서 찾을 수 있겠고, 나아가, 저 시대 활발한 교유를 통해 저런 사실을 전달하며 그 욕망을 부채질한 사람은 틀림없이 고려인들이었음을 것임을 상정할 수 있겠다.
저 자은종慈恩宗 승려 혜진惠珍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구체로 조사해 보지 아니해서 자신은 없지만, 그가 고려를 방문한 1091년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한창 활동하던 그 시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의천이 동아시아에서 어떤 위상을 누리는 인물인지는 내가 여러 번 강조했지만, 저 자은사 승려 혜진 또한 틀림없이 의천에 연줄이 있거나 혹은 대려했음에 틀림없다.
나는 저 욕망을 부채질한 통로로 의천을 지목한다.
그렇다면 왜 고려왕조는 거절했는가? 볼짝없다.
첫째 성가심이며 둘째 정보 유출이다. 저런 유람은 지리지의 정보 공개를 의미하는데, 저 유람은 고려 사정을 속속들이 송 왕조에 바치는 역할을 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고려는 거절한 것이다.
이는 동시대 의천을 필두로 하는 고려 사람들이 송 왕조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입수하는가 하면, 각종 정보를 캐내고자 한다 해서 송 조정에서 비난이 봇물 터지듯하는 하는 사태에 비견하면 그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으며 그만큼 각국은 정보전에 사활을 걸었다.
고려왕조는 송과 요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야 했다. 그만큼 정보가 더 중요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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