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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날벼락 같은 명령, "무령왕릉은 중국식 벽돌무덤으로 만든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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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하는 엔지니어들
 
백제 조정에서 어느 시점에 무령왕과 그 부부가 묻힐 무덤을 만들라는 명령을 발동했는지는 그것이 수릉壽陵인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공포된 그 명령은 백제 엔지니어들을 일순 패닉 상태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 명령을 보니 자기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백제 행정시스템이 어땠는지는 추적이 용이하지 아니해서 그 정확한 실상을 증언하는 기록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니, 아무튼 성왕聖王 시대에 정비했다는 관부로는 내관內官 12부를 포함한 22부部가 알려졌으니, 이를 기준으로 할 때 왕릉 조성과 같은 일은 현재의 국토교통부 같은 데서 전담했을 법하지만, 이런 일을 정확히 어떤 부서에서 관장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송산리 29호분. 이 무덤은 왜 바닥과 관대만 중국식 벽돌일까? 왜? 왜? 왜?

 
조선시대처럼 왕이 죽으면 임시 TF인 산릉도감山陵都監 같은 기구가 한시로 설치되었음을 고려할 때 그것이 국가의 대사大事이니 백제 역시 그랬을 법하지만, 아무리 TF라 해도 그것을 주도하는 관부官府는 있기 마련이라, 현재 우리한테 주어진 자료들을 의하건대 이런 일은 명칭으로 보건대 도검을 필두로 하는 왕가 상징물 제작을 했을 도부刀部라든가 직물 관련 부서로 추정하는 주부綢部, 토목 담당이었을 木部, 의례라든가 법률 집행을 담당했을 법부法部 등이 관여했을 것만은 분명하다 하겠다. 아마 이들이 산릉도감이라는 TF 팀을 구성했을 것이다. 

한데 백제 조정에서 이제 왕릉은 벽돌로 쌓는다는 전대미문의 시방서가 하달된 것이다. 이런 공포는 왕릉 조성이라면 으레 우리가 하는 일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지탱하던 이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왜? 어느 누구도 벽돌무덤은 만들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그런 벽돌무덤 총감독은 백제 기술자도 아니요, 저 머나먼 외국 중국 양梁나라에서 그 황제가 파견한 쏼라쏼라하는 중국 기술자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랬다. 실제 백제로서는 건국 이래 처음 시도하는 중국식 벽돌무덤을 만들 기술도 없었으니, 그런 새로운 시도를 중국 기술자한테 맡기는 것은 당연했고 실제로 일은 그렇게 진행됐다. 

그렇다면 백제 엔지니어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 중국 기술자가 요구하는 대로 왕릉에 소요하는 막대한 벽돌과 목가구를 대는 일을 보조할 뿐이었다. 그 막대한 벽돌을 구워내기 위해서는 그에 맞춤하는 새로운 가마가 필요했으며, 그를 위한 흙 채취와 그에 소요하는 벌목 같은 허드렛일을 백제 사람들이 맡아야 했다.
 
더구나 왕의 시신을 안치할 목관 자재도 듣자니 왜국倭國에서 이미 공수해온 상태라 하는데, 그것도 백제에서는 시도한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 다시 말해 단면 6각형 혹은 단면 우체통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 전개에 백제 기술자들은 좌절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쏼라쏼라 총감독

 
 
그러면서 이들은 권토중래를 꿈꾸면서 틈만 나면 중국 기술을 씹어돌렸고, 그 총감독을 비롯한 중국에서 파견한 기술자들 행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들을 본국으로 축출할 궁리를 했다. 왜? 그래야만 우리가 살기 때문이지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는 이를 증언하는 아무런 흔적 혹은 기록이 없다 해서 에이 그건 소설이라 단칼에 내칠 수는 없다. 유물 유적 너머에서 우리는 그러한 흐름을 간취해야 하며, 나는 저 무령왕릉이라는 백제로서는 전대미문하는 새로운 기술 시도에서 백제 장인들의 좌절과 분노를 본다. 존재 가치를 상실한 기술자는 더는 설 곳이 없었다.

그들한테 전축분 도입은 치욕이었으며 존재 기반의 상실이라는 위험으로 몰아넣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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