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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날발捺缽, 계절별로 달리하는 거란의 황제 거둥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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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묘사한 거란 황제 막사. 아장이 이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다.

 
오래다기 보다는 질긴 역사를 자랑하다 야율아보기 시대에는 완연한 정치체로 성장함에 따라 요遼, 혹은 그네들 스스로는 대요大遼라는 왕조 명으로 칭하기도 하면서 그 자체 국가로서 혼용하지만, 거란은 이 국가 체제로 접어들어서도 그 이전 유목 특성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유목하는 성격을 현격히 드러내는 지점이 황제들이 계절별로 보내는 지점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유목하는 족속과는 달리 정주定住하는 성향이 강한 데서는 그 군주가 상거하는 집이 있어 이를 궁宮이라 하고, 그 궁이 상거하는 집이 되며, 아주 가끔씩 출타를 하기도 하니, 이 출타를 순행巡行 혹은 순수巡狩(巡守라고도 한다)라 하거니와, 이 출타 때 이용하는 집을 걸어다니는 궁궐이라 해서 행궁行宮이라 하고, 가다가 잠시 머무는 데라 해서 행재소行在(所)라 하기도 한다. 

행궁은 아무래도 상거하는 궁궐에 견주어 유사 사태에 대비한 군사적 방어가 중요하므로, 이런 군사적 특징을 강조할 때는 행영行營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무튼 순수 혹은 순행을 중국 황제 같은 경우는 5년마다 한번씩이니 해서 정례화하기도 했지만, 실은 이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하는둥마는둥하고, 실제로는 비정기적으로 시행되곤 했으니 무엇보다 그에 따른 지출, 더 간단히 말해 돈이 너무 많이 든 까닭이다.

군주 한 명이 움직이면 그 움직이는 고장 혹은 인근 지역은 살림이 거덜난다. 그만큼 행차 규모가 크고 그에 따른 제반 비용이 엄청난 물량을 소요한 까닭이다. 

이야기가 많이 벗어났거니와, 거란은 역사에 출현한 이래 물론 넒나듦이 있기는 하지만 주된 근거지는 아래 지도가 표시한 주된 활동 반경이다. 
 

 
이른바 요하 대평원이라 일컫는 데가 그곳이라, 저 넓은 땅을 돌아다니며 주로 목축과 어로에 종사하는 이동 생활을 했다.

사람보다는 가축이 우선이라, 가축을 키우는 데는 풀과 물이 없어서는 아니되므로 계절에 따라 이 풀과 물을 찾아 뱅글뱅글 돌았던 것이다. 

거란은 이 습성을 왕조를 건립하고 난 뒤에서 잊은 적이 없다. 무엇보다 황제가 가만 있지는 못하고 걸핏하면, 아니 계절에 따라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주하는 문명에서 행궁은 일시하는 데코레이션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목하는 데서는 그것이 상거하는 궁에 버금하는 영향력과 상징을 지닌다는 점이 두 문화권간 결정적인 차이를 빚는다. 

거란이 1대 야율아보기 시대에는 땅 따먹기 사람 따먹기에 여념이 없다가 2대 태종太宗 시대에 이르러 황도皇都를 상경上京으로 삼고 유주幽州를 남경南京(훗날 동경東京으로 개칭)으로 삼은 데 이어 성종聖宗이 중경中京을 만들고 흥종興宗이 운주雲州를 서경西京으로 삼음으로써 이른바 5경五京이라 해서 서울을 다섯 곳이나 설치한 이유 또한 한 자리 머물기 싫어하는 유목민 특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요사遼史 권32 지志 제2 영위지營衛志 중中 행영行營은 바로 계절별 황제가 순행하는 행궁을 말함이라, 이 행영 곧 행재소를 거란말로는 날발捺缽이라 했다. 

먼저 춘날발春捺缽, 곧 봄에 날발하는 곳을 압자하박鴨子河濼이라 하니, 이곳은 황제가 정월 상순에 아장牙帳을 세워 행차하고는 대략 60일을 보내게 되는데, 이 압자하鴨子河는 동서 너비가 20리에 남북 길이가 30리 정도라 장춘주長春州 동북쪽 35리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에 머물면서 얼음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한다. 

그런 다음 하날발夏捺缽, 곧 여름 날발로 옮기는데, 이때는 보통 딱 정한 곳은 없지마는 토아산吐兒山이라는 데로 행차하는 일이 많다.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은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주로 피서避暑다.

토아산吐兒山은 흑산黑山 동북쪽 300리 지점에 위치하며 근처에 만두산饅頭山이 있다. 흑산은 경주慶州 북쪽 30리 지점에 위치하며 위쪽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금련金蓮이 핀다.

이곳에서는 4월 중순에 아장을 세우고 길지吉地를 택해 납량納涼하는 곳으로 삼는다. 50일 정도 머물다가 7월 중순에 떠난다. 

추날발秋捺缽, 곧 가을날발은 복호림伏虎林이라는 데서 하는데 7월 중순에 납량하는 곳을 떠나 이곳에 아장을 세우고는 산에 들어가 사슴이나 호랑이 사냥을 한다. 그 숲은 영주永州 서북쪽 50리 지점에 있다.

호랑이가 이곳에 웅거하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밤이 깊어지면 소금물을 찾는 사슴떼가 나타날 때 활로 쏘아 그들을 사냥하는데 이를 지감록抵堿鹿 혹은 호록呼鹿이라 부른다. 

그런 다음 동날발冬捺缽, 곧 겨울날발로 옮겨가는데 이를 보내는 곳을 광평정廣平澱이라 해서 영주永州 동남쪽 30리 지점에 위치한다. 본래 이름은 백마정白馬澱이라 했다.

동서 너비 20여 리요 남북 길이 10여 리 정도다. 겨울이 따듯한 지방이라 황제들은 대체로 이곳에서 아장을 세우고 겨울을 보내며 북남 대신北、南大臣들과 국사를 논의하고 사냥으로 무예를 익히고 송을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 조공을 받는다.

물론 이런 패턴을 항상 따를 수는 없다. 대체로 그랬다는 뜻일 뿐이다. 언제나 임시방편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깐. 

영위지에서는 동날발 바로 아래에 황제가 머무는 임시 공간인 아장牙帳을 어찌 설치하는지를 상세히 묘사했거니와, 이 묘사가 동남발에만 해당하는 사항인지 아니면 전체 날발에 다 해당하는 것인지는 나는 자신이 없다.

추위를 이기기 위한 운운하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계절별 아장이 달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이제나 저제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니, 이를 정리한다. 
 

드라마가 설정하는 거란 황제 아장 내부

 
몇몇 구절에는 자신이 없어 원문을 첨부한다. 

황제의 아장은 창槍으로 단단한 울타리[硬寨]를 치고 모승毛繩[털줄]으로 연결한다. 각 창 아래에는 흑전산黑氈傘[검은 양탄자 가리개] 하나씩을 두는데 이는 위사衛士[호위병]들이 풍설風雪을 막기 위함이다. 창槍 밖으로는 작은 전장氈帳 1개 층層을 두고 각 장帳마다 다섯 사람을 세우고 각각 병장兵仗을 쥐고는 금위禁圍[금단의 테두리 지역]을 만든다. 남쪽에는 성방전省方殿이 있고, 그 전殿 북쪽 약 2리 지점 건물채는 수녕전壽寧殿이라 일컫는데 모두 나무기둥[木柱]과 대나무 서까래[竹榱]로 만들며, 전氈[양탄자 같은 것]으로 덮개를 삼고 기둥에는 각종 채색으로 기둥을 장식하며 비단錦으로 벽의壁衣[벽을 그렇게 장식한다는 뜻인 듯]를 삼고 붉은 비단 편액[繡額]을 단다. 

皇帝牙帳以槍為硬寨,用毛繩連系。每槍下黑氈傘一,以庇衛士風雪。槍外小氈帳一層,每帳五人,各執兵仗為禁圍。南有省方殿,殿北約二里曰壽寧殿,皆木柱竹榱,以氈為蓋,彩繪韜柱,錦為壁衣,加徘繡額。

나아가 황색 포[黃布]에 용을 수놓아 지장地障으로 삼고, 창窗[창문]과 격槅[창살]은 모두 전氈으로 만들며, 황색 기름 비단[黃油絹]을 그 위로 덮었다. 기단은 높이 1척 남짓하고 양쪽 회랑廂廊廡[행랑] 역시 모전[氈]으로 덮되 문[門戶]은 없다.

성방전省方殿 북쪽에 녹피장鹿皮帳이 있으니 그 장帳 북쪽에 팔방공용전八方公用殿이 있다.

수녕전壽寧殿 북쪽에는 장춘장長春帳이 있고 단단한 울타리를 두른다.

궁에서는 거란 병사 4천 명이 있고 매일 1천명씩 돌아가며 차례로 번을 선다.

금위禁圍 밖에서는 탁창卓槍[무슨 말인지? 단국대 팀은 탁자에 창을 꽂아 라고 번역]해서 담장寨을 만들고 밤이 되면 창을 뽑고 탁자는 어침장御寢帳으로 옮긴다. 주위로는 말들이 오는 것을 막고 밖으로 포병鋪兵[도성을 지키는 병사라고]을 두고 전령傳鈴이 숙위宿衛한다. 

又以黃布繡龍為地障,窗、槅皆以氈為之,傅以黃油絹。基高尺餘,兩廂廊廡亦以氈蓋,無門戶。省方殿北有鹿皮帳,帳次北有八方公用殿。壽寧殿北有長春帳,衛以硬寨。宮用契丹兵四千人,每曰輪番千人祗直。禁圍外卓槍為寨,夜則拔槍移卓御寢帳。周圍拒馬,外設鋪,傳鈴宿衛.

매년 네 계절마다 돌고는 다시 시작한다. 

황제가 네 계절 순수巡守하면 거란 대소 내외 신료臣僚들과 복역하는 사람, 그리고 한인漢人 선휘원宣徽院에 속한 뭇 관서 관리들이 모두 따른다. 한인漢人 추밀원樞密院과 중서성中書省은 오직 재상宰相 1명과 추밀원樞密院 도부승지都副承旨 두 사람, 영사令史 10명, 중서령사中書令史 1명, 어사대御史臺 대리시大理寺에서는 한 사람씩 뽑아 호종扈從한다.

매년 정월 상순에 거가는 행차에 나선다. 재상 이하는 중경中京으로 돌아와 거수居守하고 한인漢人을 보내서 제반 공무를 처리한다.
관료를 임명하고 당첨堂帖을 하달하는 일은 행재소 회의를 기다려 황제의 재가를 얻은 다음 고칙誥敕을 내려 보낸다.

문관文官 현령縣令과 녹사錄事 이하는 아뢰지 않되 중서성에서 전형해 선발한 관리는 아뢰며 무관武官은 반드시 주문奏聞해야 한다. 

5월에 행재소에서 납량納涼하고 남북 신료 회의를 하며 10월에는 겨울 행재소에서 이와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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