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이 야율아보기 시대에 건국하고서 국호를 대요大遼라 한 것은 분명 요하遼河 혹은 요수遼水라 일컫는 강을 염두에 두었다. 이 요수는 무수한 지류를 끌어들이며 지금의 중국 동북 지역 대평원을 형성하는 젓줄이거니와, 그런 까닭에 이 강은 이 일대를 지칭하는 대명사 같은 위치를 점거한다.
이 강을 일러 遼라 하거니와, 이 요수 혹은 요하 문제는 한국고대사에서는 특히 고조선 위치 관련해서 언제나 중대한 자리를 점거하거니와 예컨대 이미 진한대에 등장하는 요동군遼東郡이며 요서군遼西郡이니 하는 군현 위치만 해도 그 절대의 준거점을 요하 혹은 요수로 잡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데 저 遼가 모름지기 특정한 강을 의미하는가? 이 의문을 아무도(혹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심각하게 묻지 않았다. 나는 이 점을 따지고자 한다.
遼는 현재까지 우리한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요동군 요서군이 등장하는 무렵에는 결코 특정한 강을 지칭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중대하다. 특히 요동군 요서군 위치를 논할 때는 그 가장 중대한 출발점이 된다.
왜 이 점을 묻지 않았는지 나는 매양 의구심이 증폭하지 않을 수 없다. 遼가 저 시대에 강이 아니라 다른 개념이라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지며, 따라서 요동군 요서군도 완전히 달라진다.
이른바 재야사학에는 심지어 요수 혹은 요하를 지금의 요하가 아닌 다른 강, 예컨대 난하라든가 대릉하 소릉하를 지칭한다고 하면서 입론을 전개하나, 여전히 遼를 특정한 강을 염두에 둔 발상이라는 점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지금의 요하를 간주하는 견해랑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나는 遼가 적어도 요동군 요서군 등장하는 무렵에는 결코 강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요동군 요서군을 논할 때 그것이 지금의 요하건, 대릉하건 소릉하건 난하건 관계없이 결코 강을 준거로 따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遼는 부수자가 辵라, 이는 足을 염두에 둔 말로 달린다 걸어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것을 부수자로 쓴 遼는 발걸음, 곧 거리를 염두에 둔 개념이지 결코 강이 아니다.
둘째, 진한 시대에 遼가 강 이름으로 쓰인 적이 없다. 그것이 쓰인 맥락을 보면 역시나 앞서 말한 그대로 거리 개념을 염두에 두고서 원遠, 곧 거리가 멀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설문해자에 이르기를 이 글자를 遠也라고 풀면서 부수자가 辵인 형성자라 했다. 간단히 말해 이 글자는 뜻은 辵에 있고 그 소리는 尞라는 것이다.
저 글자는 진한 시대에는 요원遙遠하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앞서 본 설문에서 명확하다. 나아가 초사楚辭 구장九章 중 추사抽思 편에 이르기를
「惟郢路之遼遠兮,魂一夕而九逝。」
라 했으니, 이 구절 의미는 대략
영도로 가는 길 그리도 먼 길을 하룻밤에 이 내 혼은 아홉 번을 돌아가네.
라는 정도다.
우리가 저 遼를 논할 적에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또 다른 가장 중대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 글자가 흔히 강을 의미할 때 부수자로 쓰는 물 水자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적어도 저 글자가 등장하는 저 시점에는 강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나는 내심 이에다가 무게를 둔다.
저 遼라는 글자는 강과는 하등 관계 없고 단순히 당시 서울 장안이나 낙양을 기준으로 먼 땅이라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으며,
그런 먼 땅 중에서도 그 동쪽을 요동군이라 하고 서쪽을 요서군이라 해서 가른 데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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