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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이후] (1) 파탄난 양다리 외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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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송 항로가 나중에 남하한다. 산동반도에서 영파로 바뀐다.




대략 30년간 파국을 맞은 고려-거란 관계가 1019년 2월 귀주대첩을 고비로 일단락하면서 두 왕조는 급격히 외교관계를 회복하니 이는 곧 고려와 宋 관계의 재편을 의미하기도 했다. 

거란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고려는 거란과의 국교 일체를 단절하고서는 일방적으로 송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종주국을 송으로 바꾼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제 이런 임시방편도 끝낼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귀주대첩이 있는지 대략 1년 반 정도가 지난 현종 11년, 1021년 6월에 한조韓祚를 우두머리로 삼은 사절단을 송에 보낸다.

이 일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遣韓祚如宋, 韓祚如宋, 謝恩, 곧 한조를 송에 보내어 사은謝恩했다 해서 대단히 무미건조하게 적혔고, 이듬해 현종 12년, 1022년 5월 병자일에는 한조가 귀국하면서 송 황제가 하사한 성혜방聖惠方, 음양이택서陰陽二宅書, 건흥력乾興曆, 불교 전적 1장藏을 가져왔다 덧붙였으니, 그가 왜 가야 했는지가 아리숑숑하기만 하다. 





사은? 

그런 의문은 송사宋史 권487 열전列傳 권 제246 외국外國3 고려 전에서 어느 정도 풀리니 그에 이르기를

(북송北宋 진종眞宗) 천희天禧〉 5년(1021) (고려왕) 왕순王詢(현종)이 고주사告奏使로 어사예부시랑御事禮部侍郎 한조韓祚 등 179인을 보내와서 은혜에 사례하고 또 거란과 통호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또 표문表文으로 음양지리서陰陽地理書와 성혜방聖惠方을 요청하니, 모두 내려주었다.

五年, 詢遣告奏使御事禮部侍郎韓祚等一百七十九人來謝恩, 且言與契丹修好, 又表乞陰陽地理書·聖惠方, 並賜之。

라 했으니, 보낸 이유가 이제 우리는 주인을 거란으로 바꾸기로 해서 미안하다. 그동안 고마웠다. 하지만 우리 잘 지내 보자. 먼 길 온 김에 빈손으로 돌아가니 그러니 너네 요새 좋은 책 나왔다 하는데, 것 좀 우리 주라 딱 이거다. 

한데 고려가 이때 챙겨간 서적 목록이 고려사 쪽에서는 더 보강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식 교류는 뜸해질 수밖에 없는데, 현종 시대의 경우 이후에는 그의 재위 말년에 이르는 21년, 宋으로서는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  원영元穎이라는 사람을 우두머리로 삼은 293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신단 파견을 마지막으로 그나마 아예 한동안 종적을 감추고 만다. 



산동반도 북쪽 항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어사민관 시랑御事民官侍郞 원영은 표문을 받들고는 장춘전長春殿에서 황제를 알현하면서 금기金器, 은계도검銀罽刀劍, 안륵마鞍勒馬, 향유香油, 인삼人蔘, 세포細布, 동기銅器, 유황硫黃, 청서피靑鼠皮 등의 물품을 조공으로 바쳤다고 송사 고려전에는 적었다.

이들은 이듬해 귀국하는데 황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등주까지 특별 호송했다고 한다.

이 일이 고려사와 절요에는 누락되었는데, 고려 쪽에서 원영이라는 이름이 확인되며, 나아가 그 주된 활동시기는 현종이라는 점에서 누락이라고 봐야 한다.

내친 김에 원영 행적을 보면 제2차 고려거란전쟁 당시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으로 판관判官이 되어 강조를 따라 출전했으며, 20년이 지난 1033년 11월에는 서경부유수 지분사호부사西京副留守 知分司戶部事가 되었고 1039년 1월에는 공부상서工部尙書로서 춘하번 서북로병마사春夏番 西北路兵馬使가 된다. 이듬해에는 9월에 다시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된다. 

이 일이 국가의 대사인데 왜 누락되었을까? 나는 일부러 당시 고려사 찬자들이 누락했을 가능성도 본다. 

왜냐 하면 이것이 이후 43년이나 송과 국교를 단절하는 직접 동기가 되는 까닭이다. 고려도경에는 “고려 왕 왕순王詢이 졸하고 아들 왕륭王隆이 즉위하였는데, 결단성이 부족하여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북쪽 오랑캐를 꺼려 드디어 다시 신하로 섬겼다.

이에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고 했거니와, 왕륭은 잘못된 이름이기는 하지만 이 대목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간단히 말해 당시 거란에서 압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제 그만 송과 붙어 놀아라, 그만 하면 됐다 하고 협박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고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후 40년 간이나 송과 외교관계까지 단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고려로서는 송의 문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송의 문화는 달콤한 꿀이었다. 

한동안 격절 끝에 재개된 훗날 고려의 대송對宋 교섭은 문화 부분에 집중하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도 거란의 의심을 살 만한 정치 사안은 일부러 배제했음은 불문해도 가지하다.

그러니 이런 행태가 얼마나 송으로서는 얄밉게만 보이겠는가? 지들은 우리한테 주는 것 없이 다 빼내간다 딱 이런 이미지였다.

실제 소동파는 그 강경파를 대표해 고려랑은 일체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고려 외교가 실리노선? 양다리 외교? 웃기는 말 좀 작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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