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알로타斡魯朵, 황제마다 따로 만든 거란의 궁궐

by taeshik.kim 2024. 3. 11.
반응형

 
이 전통을 보노라면, 언뜻 고대 일본을 떠올린다. 이 친구들 역시 걸핏하면 그 역사성은 치지도외하고라도 새로운 천황이 즉위하면 새로운 궁궐을 만드는 일을 능사로 삼으니, 실상 그와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데가 거란이라. 

이런 행적은 요사遼史 권31 지志 제1 영위지營衛志 상上에 요약 정리되었으니 이에 이르기를 앞서 본 계절별 행궁行宮 혹은 행영行營을 날발捺缽이라 부르는 데 견주어 상거하는 공간은 알로타斡魯朵라 했다 한다. 날발이건 알로타건 이건 모두 다 거란어를 단순히 음만 표기한 것일 터다. 

이에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즉위[踐位]하면 궁위宮衛를 두고 주현州縣을 나누며 부족部族을 가르고,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호구戶口를 조사하며 병마兵馬를 갖춘다. 천자가 붕崩하면 호종扈從하던 사람과 후비后妃의 궁장宮帳은 그 능침陵寢을 받든다. 군사를 징발할 때는 정장丁壯은 전투하고 노약한 사람은 남아서 지킨다.

天子踐位置宮衛,分州縣,析部族,設官府,籍戶口,備兵馬。崩則扈從後妃宮帳,以奉陵寢。有調發,則丁壯從戎事,老弱居守。

라고 했다. 

문제는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새로운 궁전을 새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언뜻 보면 재정 낭비일까 싶기도 한데, 그 운용 양태를 보면 지금으로서는 언뜻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들이 있지마는 아무튼 저 영위지가 정리한 역대 황제별 혹은 황후 혹은 일부 권신의 알로타를 소개한다. 

 



태조 야율아보기는 궁전을 홍의궁弘義宮이라 하고 그의 정비 응천황후應天皇后 또한 궁궐을 따로 두어 이르기를 장녕구長寧宮이라 했다. 태종太宗은 영흥궁永興宮이라 하고 세종世宗은 적경궁曰積慶宮이라 했으며 목종穆宗은 연창궁延昌宮이라 했다. 경종景宗은 창민궁彰愍宮이라 하고, 그의 정비 승천태후承天太后는 숭덕궁崇德宮이라 했다.

고려거란전쟁의 한 축인 야율륭서 성종聖宗은 흥성궁興聖宮이라 하고 흥종興宗은 연경궁曰延慶宮이라 했으며 도종道宗은 태화궁太和宮, 마지막 천조제天柞帝는 영창궁永昌宮이라 했다. 

황제의 동생도 궁궐을 따로 두기도 했으니 문장문황태제文章文皇太弟한테는 돈목궁敦睦宮이 있었다. 승상 또한 궁을 갖추기도 했으니 야율륭운耶律隆運한테는 문충왕부文忠王府가 따로 있어 궁궐 역할을 했다.

더 특이하게도 이들 궁전은 실상 능침을 겸하기도 해서, 그것과 세트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집과 그가 죽어서 가는 집이 세트를 이루니 이 두 세트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는데 이를 흔히 능시陵市라 하거니와, 거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런 면모를 보인다. 

나아가 이런 궁궐 세트, 혹은 그것이 주축인 능시를 운영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터. 그 운용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데, 이들 궁궐마다 관할하는 주州와 현縣, 그리고 기타 고을이 있어, 그네들끼리 소속 궁궐에 대한 변화도 감지된다.

이 소속 주현과 궁궐이 구체로 어떤 관계였는지는 현재로서는 내가 단안할 수는 없지만, 세금 관계가 아닌지 모르겠다. 

앞에서 말한 저들 궁위, 곧 알로타는 주州가 38개, 현縣이 10곳, 제할사提轄司가 41곳, 석렬石烈이 23곳, 와리瓦里가 74곳, 말리抹里가 98곳, 득리得里가 두 곳, 갑살閘撒이 19곳이 소속되었다고 한다. 정호正戶가 8만, 번한蕃漢으로 전호轉戶한 민호가 12만3천, 도합 28만3천호戶가 소속되었다 하는데, 이것이 무엇을 말함인지 자료를 더 조사해봐야겠다. 

 

거란 상경성 유적



저들 궁위를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산알로타算斡魯朵는 태조가 설치했다. 국어國語, 곧 거란말로 심복心腹을 「산算」이라 하고, 宮을 「알로타斡魯朵」라 하니, 곧 산알로타란 심복궁이 되겠다. 이것이 바로 홍의궁弘義宮이다. 심복 위사들로 배치하되 발해渤海 포로들과 금주錦州의 민호로 보충했다. 그 궁전은 임황부臨潢府에 있고 그 능침은 조주祖州 동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정호正戶가 팔만, 번한전호藩漢轉戶가 7천이며, 기병騎軍 6천을 출병한다. 

소속 州는 다섯 곳이라 금錦·조祖·엄嚴·기祺·은주銀州가 그것이다. 
관할 縣은 부의富義 한 곳. 
제할사提轄司는 네 곳이라 남경南京·서경酉京·봉성주奉聖州·평주平州다. 
석렬石烈은 두 곳이라 수須·속로速魯다. 
와리瓦裏는 네 곳이라 합불合不·달살撻撒·만갑慢押·호지虎池다. 
말리抹里는 만膻·예돈預墩·골돌鶻突·규리천糾里闡 네 곳이다. 
득리得里는 두 곳이라 술첩북述壘北·술천남述壘南이다. 

국아련알로타國阿孽斡魯朵는 태종이 설치했다. 수국收國을 「국아련國阿輦」이라 하니 영흥궁永興宮이 바로 그곳이라 처음 이름은 고온알로타孤穩斡魯朵였다. 太祖가 발해를 평정하면서 사로잡은 이들과 동경東京、회주懷州 제할사提轄司 및 운주雲州 회인현懷仁縣、택주澤州 난하현灤河縣 등의 민호로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발고하游古河 인근에 있었고 능침은 회주懷州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正戶 3천,번한민호 7천,출동하는 기병은 5천이다. 

州는 네 곳이라 회懷·검黔·개開·래來다。
縣은 두 곳이라 보화保和·난하灤河다. 
提轄司는 네 곳이라 남경南京·서경西京·봉성주奉聖州·평주平州다. 
석렬石烈은 북여고北女古 한 곳이다. 
瓦里는 네 곳이라 말抹·모母·합이지合李只·술루述壘다. 
말리抹里는 열 세 곳이라 述壘軫·大隔蔑·小隔蔑·母·歸化不術·唐括·吐谷·百爾瓜忒·合魯不只·移馬不只·膻·清帶·速穩이다. 
闡撤은 일곱 곳이라 伯德部·守獄·穴骨只·合不頻尼·虎里狘·耶裏只挾室·僧隱令公이다. 
 
야로완알로타耶魯碗斡魯朵는 세종이 설치했으니 거란어로 흥성興盛을 아로완耶魯碗이라 하니 적경궁積慶宮이 바로 그것이다. 
문헌황제文獻皇帝의 위종衛從과 태조太祖의 부호俘戶, 그리고 운주雲州 제할사提轄司와 아울러 고高、의宜 등의 州 민호로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土河 동쪽에 있고 능침은 長寧宮 북쪽에 있다. 正戶가 오천,蕃漢轉戶가 8천이고 出騎軍은 8천이다. 

州가 세 곳이니 康·顯·宜이다。
縣은 산동山東 한 곳이다. 
제할사提轄司는 네 곳이다. 
石烈은 한 곳이라 혜랍兮臘이다. 
瓦里가 여덟이라 撻撤·合不·吸烈·通里·潭馬·槊不·耶里直·耶魯兀也이다. 
抹里는 열 곳이라 紇斯直·蠻葛·厥里·潭馬忒·出懶·速忽魯碗·牒裡得·閻馬·迭裡特·女古다。

 

거란 상경성 유지


 
포속완알로타蒲速碗斡魯朵는 應天皇太后가 설치했다. 흥륭興隆을 「蒲速碗」이라 하니 이곳이 장녕궁長寧宮이다. 遼州 및 海濱縣 등의 민호로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高州에 있고 능침은 龍化州 동쪽 100리 지점에 있다. 世宗이 양국황제讓國皇帝의 궁원宮院을 나누어 배치했다. 正戶가 칠천이요 蕃漢轉戶가 육천이며 出騎軍은 오천이다. 

州는 네 곳이라 遼·儀坤·遼西·顯이다. 
縣는 세 곳이라 奉先·歸義·定霸다. 
提轄司는 네 곳이다. 
석렬石烈은 北女古 한 곳이다.
瓦里는 여섯 곳이라 潭馬·合不·達撤·慢押·耶裏只·渾只다. 
抹里는 열세 곳이라 渾得移鄰稍瓦只·合四卑臘因鐵里卑稍只·奪羅果只·拿葛只·合里只·婆渾昆母溫·阿魯埃得本·東廝里門·西廝里門·東钁里·西钁里·牒得只·滅母鄰母이다. 
 
탈리본알리타奪里本斡魯朵는 穆宗이 설치했으니 이곳이 연창궁延昌宮이다. 토평討平을 「奪里本」이라 한다. 

국아련알로타國阿輦斡魯朵 민호와 조복阻卜의 부호俘戶, 중경 제할사中京提轄司 남경제치사南京制置司 咸·信·韓 등의 주 민호로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규아리산糾雅里山 남쪽에 있고 능침은 경상京商에 있다. 正戶가 一千,蕃漢轉戶가 三千이며 出騎軍은 二千이다.

州는 두 곳이라 遂·韓다. 
提轄司는 세 곳이라 中京·南京·平州가 그곳이다. 
石烈은 한 곳이라 須다. 
瓦里는 네 곳이라 抹骨古等·兀沒·潭馬·合里直이다. 
抹里는 네 곳이라 抹骨登兀沒滅·土木直移鄰·息州決里·莫瑰奪石이다. 
 
감모알리타監母斡魯朵는 景宗이 설치했으니 이곳이 창민궁彰愍宮이다. 遺留를 「감모監母」라 한다. 장숙황제章肅皇帝 시위侍衛와 무안주武安州 민호를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합로하合魯河에 있고 능침은 祖州 남쪽에 있다. 正戶가 팔천이며 蕃漢轉戶가 1만, 出騎軍은 1만이다. 

州가 四라 永·龍化·降聖·同이다. 
縣이 두 곳이라 行唐·阜俗이다. 
提轄司는 네 곳.
石烈은 두 곳이니 監母·南女古다. 
瓦里는 일곱이라 潭馬·奚烈·埃合里直·蠻雅葛·特末·烏也·滅合里直이다. 
抹里는 열한 곳이라 尼母曷烈因稍瓦直·察改因麻得不·移失鄰斡直·辛古不直·撒改真·牙葛直·虎狘阿裏鄰·潑昆·潭馬·閘臘·楚兀真果鄰이다。

 

거란 오경


 
고온알로타孤穩斡魯朵는 승천태후承天太后가 설치했으니 숭덕궁崇德宮이다. 玉을 일러 「孤隱」이라 한다. 
乾·顯·雙 세 개 주 민호를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土河 동쪽에 있고 능은 경종황제 곁에 붙어있다. 正戶는 六千이며 蕃漢轉戶는 一萬, 出騎軍은 一萬이다. 

州는 넷이요 건乾·천川·쌍雙·귀덕貴德이다. 
縣은 로상경潞上京 한 곳이다. 
提轄司는 세 곳이라 남경南京·서경西京·봉성주奉聖州다. 
石烈은 셋이라 钁里·滂·迭裡特女古다. 
瓦里는 일곱 곳이라 達撒·耶裏·合不·歇不·合里直·慢押·耶裏直이다. 
抹里는 열한 곳이라 阿里廝直述壘·預篤溫稍瓦直·潭馬·賃預篤溫一臘·牙葛直·牒得直·虎溫·孤溫·撒裏僧·阿里葛斯過鄰·鐵里乖穩钁里다. 
閘撒은 다섯 곳이라 合不直迷裏幾頻你·牒耳葛太保果直·爪里阿本果直·憎隱令公果直·老昆令公果直이다. 
 
여고알로타女古斡魯朵는 성종이 설치했으니 흥성궁興聖宮이다. 金을 「女古」라 한다. 國阿輦·耶魯碗·蒲速碗 세 알로타 민호를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女混活直에 있고 능침은 慶州 南安에 있다. 正戶가 一萬이며 蕃漢轉戶가 二萬이고 出騎軍五千이다. 

州는 다섯이라 慶·隔·烏上京·烏東京·霸다. 
提轄司는 네 곳이다. 
石烈은 네 곳이라 毫兀真女姑·拿幾真女室·女特裡特·女古滂이다. 
瓦里는 여섯 곳이라 女古·蒲速碗·鶻篤·乙抵·翁·埃也다. 
抹里는 아홉 곳이라 乙辛不只·鐵乖溫·埃合里只·嘲瑰·合魯山血古只·奪忒排登血古只·勞骨·虛沙·土鄰이다. 
閘撒은 다섯 곳이라 達鄰頻你·和裡懶你·爪阿不厥真·粘獨里僧·袍達夫人撅只다. 
 
와독완알리타窩胯碗斡魯朵는 흥종이 설치했으니 연경궁延慶宮이다. 孽息을 「窩篤碗」라 한다. 여러 諸斡魯朵와 饒州의 민호로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高州 서쪽에 있고 陵寢은 上京 慶州에 있다. 
正戶 七千이고 番漢轉戶 一萬이며 出騎軍一萬이다. 

주가 네 세 곳이라 饒·長春·泰州다. 
提轄司는 네 곳이다. 
石烈이 두 곳이라 窩篤碗·鶻篤骨이다. 
瓦里가 여섯 곳이니 窩篤碗·廝把·廝阿·糾里·得裏·歐烈이 그들이다. 
抹里가 여섯 곳이라 歐裏本·燕斯·緬四·乙僧·北得里·남득리南得里다. 
 
아사알리타阿思斡魯朵는 道宗이 설치했으니 태화궁太和宮이다. 寬大함을 일러 「阿思」라 한다. 여러 알로타의 御前에서 承應하는 사람과 興中府 민호로 배치했다. 그 알로타는 호수박好水濼에 있고 능침은 上京 慶州에 있다. 正戶가 1萬,蕃漢轉戶가 2萬,出騎軍은 1만5천이다. 

石烈이 두 곳이라 阿廝·耶魯가 그들이다. 
瓦里가 여덟 곳이라 阿廝·耶魯·得里·糾里·撒不·鶻篤·蒲速斡·曷烈이다. 
抹里가 일곱 곳이라 恩州得里·斡奢得里·歐裏本·特滿·查刺土鄰·糾里·阿里廝迷里다. 
 
아로완알로타阿魯碗斡魯朵는 天祚皇帝가 설치했으니 영창궁永昌宮이다。輔佑를 「阿魯碗」이라 한다。여러 斡魯朵 御前承應人과 春·宣州 민호를 두었다. 正戶가 八千, 蕃漢轉戶가 一萬, 出騎軍이 一萬이다. 

石烈이 두 곳이라 아로완阿魯碗·유로완榆魯碗이 그들이다. 
瓦里가 여덟 군데라 아로알阿魯斡·합리야合里也·골돌鶻突·적랄敵刺·모로알謀魯斡·규리糾里·탈리랄奪里剌·특말야特末也다. 
抹里라 여덟 곳이라 포속완蒲速碗·移替·斡篤碗·特滿·謀魯碗·移典·悅·勃得本이다. 
 
효문황태제孝文皇太弟 돈목궁敦睦宮은 적실득본알로타赤實得本斡魯朵라 한다. 孝를 「赤實得本」라 한다. 문헌황제文獻皇帝 승응인承應人과 발해 포로, 建·沈·巖 세 개 주 민호로 충당했다. 능침은 祖州 서남쪽 30리에 있다. 正戶는 삼천이며 번한전호蕃漢轉戶는 오천, 出騎軍은 오천이다. 

州는 세 곳이라 建·沈·巖이다. 
提轄司는 南京 한 곳이다. 
石烈은 두 곳이라 嘲·與敦이다. 
瓦里는 여섯 곳이라 乙辛·得里·奚烈直·大潭馬·小潭馬·與墩이다. 
抹里는 두 곳이라 潭馬抹乖·柳實이다. 
閘撤은 두 곳이라 聶裏頻你·打裏頻你이다.
 
대승상大丞相 진국왕晉國王 야율륭운耶律隆運은 본래 한씨韓氏이며 이름이 덕양德讓이다. 공을 세워 국성國姓을 하사받고 궁적宮籍에 들어가서는 횡장 이부방橫帳季父房에 편입되었다. 상서령尚書令에 증직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했다. 아들이 없어 황족皇族인 위왕魏王 점불자貼不子 야로耶魯를 후사를 삼았지만 일찍 죽었다. 天祚皇帝가 다시 皇子 오로알敖魯斡로 계승하게 했다. 官에서 장구葬具를 공급하고 건릉乾陵 곁에 사당을 세웠다. 여러 궁 사례를 모방해 문충왕부文忠王府를 세웠다. 正戶가 오천이며 蕃漢轉戶가 팔천, 騎軍은 1만을 출병한다. 

州가 한 곳이다. 
제할사提轄司는 여섯 곳이라 上京·中京·南京·酉京·奉聖州·平州이다. 


 
저장낭군著帳郎君은 처음에는 요련遙輦 흔덕근가한痕德堇可汗이 포고지蒲古只 등 3부족이 우월석로于越釋魯를 해치자 그 가속을 적몰籍沒하여 와리瓦里에 배치한 데서 비롯한다. 흠순황후淳欽皇后가 그들을 용서하고는 저작낭군著帳郎君으로 삼았다. 세종이 모두 사면했다. 훗날 황족 인척 세관世官 중에 범범한 자들을 몰입沒入했다. 

저장호著帳戶는 본래 여러 알로타에서 갈라져 나오거나 뭇 죄를 지은 자들이다. 무릇 부름에 응해 소저小底·사장司藏·응방鷹坊·탕약湯藥·상음尚飲·관수盥漱·상선尚膳·상의尚衣·재조裁造 등의 노역에 종사하던 사람들과 궁중宮中·친왕親王의 시종과 영관伶官 따위로 모두 그곳을 충원했다. 

도합 여러 궁에 일하는 위인衛人은 丁이 40만8천 명이요 기군騎軍이 10만1천명이다. 저장著帳에서 풀려나오거나 몰입된 자들은 수시로 증감되어 정해진 숫자가 없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