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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간에 붙었다 쓸개 붙었다 거란을 갖고 논 서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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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가 사는 법

 
송과 거란을 사이에 둔 고려의 양다리 외교를 일러 실리외교라 하며 그것을 지금의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소리가 개소리임을 계속 주장하거니와, 그래 설사 그렇다 해도 고려는 동시대 서하에 견주면 암것도 아니어서, 서하는 거란과 송을 들었다 놨다 하며 곶감 빼먹듯 좋은 것만 다 빼먹었다. 

요사遼史 권107 열전 제45가 이국외기二國外記라 해서 거란이 교유한 이웃 나라 중에서도 고려와 서하西夏 두 왕조를 특별 취급했다 함은 이미 이야기했거니와, 이 이국 열전에 드러난 서하의 쥐새끼 같은 행태를 추려본다. 

애초에 서하는 宋을 섬겼으니, 그에 대한 급부로 송은 그 왕한테다가 송나라 황가 성씨인 조씨趙氏성을 하사한다. 그러다가 요나라 성종聖宗 통화通和 4년(986)이 되자 그 왕 조계천趙繼遷이 송을 배반하고 처음으로 요遼에 붙어서는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도독하주제군사都督夏州諸軍事라는 칭호를 하사받고는 성씨도 애초의 이씨李氏를 회복한다.

그러다가 통화 7년(989)에 이르러서는 공물을 바치니 거란에서는 왕자장王子帳 야율양耶律襄의 딸을 의성공주義成公主로 봉하고는 이계천한테 시집 보내기도 한다. 그 이듬해 9월에는 아부하는 뜻으로 사신을 보내 송나라 포로를 바치기도 하고 그 다음달에는 송과 한판 붙어 이겼노라는 승전고를 전하기도 한다. 같은해 12월에는 송나라의 인주鱗州와 부주雩州 등을 함락했다고 알려오자 거란은 사신을 보내 이계천을 하국왕夏國王에 책봉한다.

하지만 이계천은 엉큼했다. 이렇게 겉으로는 잘보이는 척했지만 속셈은 달라서 송과도 밀약을 거듭했으니, 이를 안 거란에서는 통화 9년(991) 12월에는 한덕위韓德威를 사신으로 보내서 너희 그러면 안 된다 따진 일도 있다. 이 일은 결국 양국 관계를 악화하기도 하는데, 이계천은 계속 거란과 송을 가지고 놀았다.

이계천 아들 이덕소李德昭 시대는 그런 대로 관계가 좋았다. 거란은 계속 서하를 자기 편으로 붙잡아 두어야 했기에 흥종이 즉위하면서는 이덕소 아들로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이원호李元昊한테 흥평공주興平公主를 시집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원호와 흥평공주는 금슬이 좋지 않은 가운데 공주가 죽었다. 거란은 이원호가 일부러 죽인 것이라 의심해서 사신을 보내 사유를 따져 물은 일도 있다. 

이 무렵 송과 서하는 특히 사이가 더 좋지 않아 국경지대에서 걸핏하면 전쟁을 벌였다. 이 두 나라 사이에서 거란이 할 수 있는 일은 싸우지 마라는 하나마나 한 중재뿐이었다. 대국이면서 종주국인 거란이 왜 이랬는가? 간단하다. 어느 한 쪽 편을 드는 순간 다른 편은 적으로 돌변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보스 노릇도 참말로 힘들 수밖에 없다. 일방적으로 깔아뭉갰을 것 같지? 천만에 국제관계가 그리 단순한 것 같은가?

전반으로 보아 이원호 시대 거란과 서하 관계는 위태위태했다. 
이원호가 죽고 들어선 그의 아들 이량조李諒祚 시대 두 나라 관계는 최악을 향해 달렸으니 서하에서 보낸 사신을 거란이 억류하는 사태로 발전하더니, 심지어는 중희 18년(1049) 7월에는 황제가 친히 서하를 토벌했다.

하지만 이때 거란 피해 또한 막대했다. 소혜蕭惠가 하나라 군대에 패하더니 초토사招討使 야율적고耶律敵古는 이원호 처와 그 궁속을 사로잡기는 했지만 저항에 부닥쳐 적지 않은 인명 피해를 봤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거란은 대대적인 서하 토벌에 나서 일정한 전과를 내니 겨우 다시 서하를 붙잡아두는 데는 성공했다. 즉, 위험에 처한 서하는 이량조 엄마, 곧 태후 명의로 표문을 보내서 옛날처럼 거란을 섬기겠다고 하고, 그것을 이어 두 달 뒤에는 이량조 본인도 그리 하겠노라고 사과문을 바쳤다.

하지만 이것이 표리부동임은 거란도, 서하도 알았다. 국제관계는 냉혹해서 서로가 속이는 것을 알고서도 묵인하고 넘어가야 할 때가 많다. 이때가 그랬다. 

이량조 시대가 두 나라 관계가 부침이 가장 심했으니, 그가 죽어 그의 아들 이병상李秉常이 즉위하면서 겨우 안정을 찾았지만, 이제 거란의 시대가 저물어 갔다. 심지어 여진에 밀려 멸망 일보 직전에 밀려서는 도망치는 거란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를 향해서는 우리 서하로 넘어오라는 일까지 있었다. 갖고 논 것이다.

고려가 실리외교? 실리외교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 정도를 실리외교라 한다면 그 정도를 하지 않은 나라 없다는 점에서 고려의 실리외교라 해서 대서특필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어줍잖은 겉핥기로 역사를 함부로 억단하는 일은 삼가고 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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