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에 걸쳐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를 통해 2005년 8월에 송고한 같은 제목 기사는 마침 당시 박혁거세 탄강지인 경주 나정 발굴성과에 즈음해 이곳이 틀림없는 나정이요 신궁임을 확신하는 내용으로 점철한다.
내가 언젠가 말했듯이 신궁을 나만큼 아는 사람 단군조선 이래 이 지구상,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나정은 발굴결과 우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남에 따라, 신라시대 나정이 아니라는 문제제기도 이후 이은석 선생을 비롯해 몇몇에 의해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제목에서 열거한 저런 정사당政事堂 겸 제장祭場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한다.
지금의 경주 나정은 신라시대 그 나정임에 틀림없고, 더구나 그에 들어선 제장은 신궁임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함이 없다.
신궁이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로 아는 이가 많지만, 웃기는 소리다. 신궁은 동아시아 고대세계를 관통하는 공통의 유산이며, 더구나 그 공통을 저변하는 분모는 국모묘國母廟다.
발굴 이전 나정
나정을 지금까지는 아무도 박혁거세 어머니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나정은 혁거세 중심이 아니라 그런 국가 시조를 낳은 국모國母 주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신궁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왜 이세신궁이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를 봉안하는 국가 종묘이며, 왜 당 왕조를 무너뜨린 무측천이 그 국가 이름을 周라 하고, 그 종묘를 신궁이라 했는지 비로소 이해한다.
동아시아 관점에서의 신궁에 관한 대작大作 논문은 내가 기 발표한 바가 있으므로, 그것으로 대체하고, 오늘은 2005년 나정 발굴 당시로 돌아가 그때까지 내가 정리한 나정과 신궁관神宮觀을 다시금 정리한다.
2005.08.24 17:00:12
<남당ㆍ도당ㆍ명당ㆍ신궁, 그리고 나정(蘿井)>(1)
중앙문화재연구원, 경주 나정 발굴 성과 설명
완연한 4각 담장의 한복판에 8각형 건물 배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 탄강 전설이 서린 경주 나정(蘿井. 사적 246호)은 발굴 조사 결과 완연한 4각 담장 한복판에 8각형 건물을 배치한 구조로 드러나고 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은 2002년 5월 이후 올해까지 4차년도에 걸친 나정 발굴성과를 총정리하는 현장조사 설명회를 24일 개최했다. 조사단 발표에 의하면 나정 일대 약 3만600㎡를 발굴한 결과 팔각 건물지 기단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7기, 초기철기시대 수혈유구 1기, 삼국시대 수혈유구 6기 등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나정 유적 팔각형 건물터
이날 연구원 조사 성과 발표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애초에 이곳에 있던 우물이 5-6세기 무렵에 팔각형 건물이 기존에 있던 구상유구(溝狀遺構)를 대신해 새로 들어서게 되면서 폐기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에 의한다면 팔각형 건물은 5-6세기 무렵에 처음 축조된 셈이 된다. 아울러 그 이전에는 이곳에 우물이 있었고, 그것을 감싼 채 빙 돌아가며 도랑 비슷한 시설물이 원형으로 배치돼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혁거세가 탄강했다는 전설이 어린 나정(蘿井)은 신라시대 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를 밝혀줄 만한 확실한 명문(銘文) 자료 등이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조사 결과 드러난 구조나 신라 왕경(王京)에서의 위치, 그리고 발굴 유물을 볼 때 그 성격을 대강이나마 짐작게 해준다.
무엇보다 이곳이 제사 등과 관련된 모종의 신성(神聖) 공간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상당 기간 동안 상주(常住)할 수 있는 시설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일반 주거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나아가 그 구조가 네 모서리 담장을 각각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맞추고 있으며(한변 길이 50m), 아울러 그 복판에 8각형 건물지를 배치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히 뒷받침된다.
8각과 4각이 세트를 이룬 이런 모티브가 동아시아 사상사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났다는 사상을 구현하고 있음은 재삼 지적이 필요없다. 8각은 곧 원(圓)과 동의어로서 하늘을 상징하며 네 담장은 땅이다.
그러므로 발굴결과 드러난 나정은 구조상으로도 사상사적으로도 가장 명백한 천원지방을 구현하고 있는 셈이며, 이는 나아가 천지(天地)가 나정 땅에서 합일(合一)된다는 정신을 상징화한 것이다.
팔각형 건물터와 원형 수혈
나아가 이는 이곳이 천신(天神)과 지기(地祇. 지신<地神>)를 합사(合祀)해 제사하는 공간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구조상으로 나정은 적어도 5-6세기에 팔각형 건물이 들어서고 그 주위로 4각 담장이 배치된 이후에는 천지를 함께 제사하는 공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공간은 도대체 무엇이라 해야 할까? 5-6세기 이후 지금의 나정에 들어서 있던 4각 담장 갖춤 8각형 건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를 해명하는 키워드는 5-6세기 이후 신라 왕경에서 현재의 나정이 어떠한 공간(위치)을 차지하고 있었던가를 해명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taeshik@yna.co.kr
(계속)
2005.08.24 17:02:48
<남당ㆍ도당ㆍ명당ㆍ신궁, 그리고 나정(蘿井)>(2)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9년(679) 조에 의하면 이 해 2월에 "궁궐을 다시 수리하니 자못 극히 웅장하고 화려했다"(重修宮闕 頗極壯麗)고 증언하고 있다. 이때는 중국은 당(唐) 고종(高宗)이 사용한 연호인 조로(調露) 중 원년이 된다. 바로 직전까지 중국은 3년 동안 의봉(儀鳳.676-678)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의봉이라는 연호가 계속 사용되었다면 조로 원년은 의봉 4년이 되는 셈이다.
팔각형 건물터 심주心柱 자리
한데 나정에서는 '의봉 4년(儀鳳四年)'이란 명문이 적힌 기와가 확인됐다.
이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679년에 현재의 나정에 들어서 있던 팔각 건물이 대대적으로 수리가 되었다는 뜻인 동시에 둘째, 그 건물이 궁궐(宮闕)의 일부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이 팔각 건물이 정확히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궁궐의 일부분이었으며, 그랬기에 문무왕 19년에 대대적으로 수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 문무왕 시대에 왕궁(王宮), 즉, 왕이 사는 거주공간은 어디였던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정답이 있다. 그곳은 바로 월성(月城)이다. 국립경주박물관과 황룡사 터와 인접한 바로 그 월성이다.
한데 이 월성을 기준으로 하면 나정은 거의 정확히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왕궁 남쪽에 위치한 이런 제사시설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명당(明堂)이라 불렀다. 여기서 명(明)이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방향으로는 태양이 이글거린다 해서 남쪽을 상징한다.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4대 문 중 남쪽 정문을 가리키는 광화문(光化門)의 광(光)자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나아가 남쪽은 음양설에서는 태양과 연동하므로 당연히 북쪽에 대해 양(陽)이 되며, 그런 양 중에서도 그 강렬함이 가장 크다 해서 태양(太陽)이라 한다. 이에 대해 동쪽은 소양(小陽)이다.
따라서 태양과 남쪽을 상징하는 이런 명당(明堂)은 나아가 왕자(王者)와 동일시되어 명당은 왕화(王化. 왕의 교화 혹은 시혜)를 베푸는 공간으로 상징화되기에 이른다. 대한제국 때 환구단을 경복궁 정남쪽에 만든 까닭과 완연히 동일하다.
왕화를 베푸는 장소로서의 명당에 대해서는 이미 주례(周禮)라든가 예기(禮記) 효경(孝經) 맹자(孟子) 순자(荀子) 여씨춘추(呂氏春秋)와 같은 전한(前漢)시대 이전에 출현한 문헌에서 집중적으로 보이고 있다.
팔각형 건물터와 원형 수혈건물
'맹자'라는 책에서 그 주인공 맹자(孟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써 "명당이란 왕자(王者)의 당(堂)입니다. 왕이 왕정(王政)을 행하려 한다면 이를 헐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예기 중 명당위(明堂位)란 곳에는 "명당이란 제후(諸侯)의 존비(尊卑. 높고 낮음)를 밝히는 곳이다"고 한다. 왕자가 이상적인 통치를 베푸는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명당이 이미 예기 단계에 와서는 군신의 질서를 확인하는 곳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마디로 천자가 제후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조하(朝賀)를 받는 곳이 명당인 셈이다.
이런 특성에서 말미암아 명당이란 곳은 이후에는 매년 정월 아침에 황제가 주관하는 가운데 뭇 신료가 참석해 군신 관계를 확인하는 장중한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발전하게 된다.
왕자는 태양이요 하늘이므로,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그 조상신들을 배천(配天)한다. 배천이란 쉽게 말해 하늘과 조상신을 동렬에 위치케 하는 작업이다. 천자의 조상이 하늘과 동급이므로 그 아들이요 후손인 지금의 천자는 당연히 하늘의 정기를 이어받은 지상의 유일한 절대 군주가 되는 것이다.
한데 문제는 아버지 할아버지 계열은 하늘과 동급이 되었다면, 어머니 할머니는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아무리 당시가 남성 우위 사회라 해도 남자 혼자만으로 태어날 수는 없는 법이므로 남자 조상신들은 하늘과 동급에 놓는 배천을 행한 반면 여성 조상신들은 땅과 동렬에 놓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금의 천자는 하늘과 땅이 조응한 절대 군주가 되는 셈이다. 명당은 지상의 절대군주는 오직 1명이라는 사실을 공포하는 장이었던 것이다.
나정 발굴
이에 의해 효경(孝經)이라는 문헌에서는 '엄부배천'(嚴父配天)이라 해서 아버지 계열 조상신들을 하늘과 동급에 배치한다고 했으며, 그러한 실례로 주 왕실 절대 공신인 주공(周公)이라는 사람이 그 조상신인 후직(后稷)을 배천(配天)하는 한편, 그(주공)의 아버지인 문왕(文王)은 명당이란 곳에서 상제(上帝)와 동급에 놓아서 제사했다"는 점을 들었다. 상제(上帝)나 천(天)은 근본적으로 같은 말이다.
천신과 지신을 앞세우고, 또 그들에 대해 조상신을 짝 지워 제사하는 이런 정치 행위의 공간이 명당이었으므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다음에도, 그런 사실을 하늘에 고하는 의식도 당연히 명당에서 하게 된다.
taeshik@yna.co.kr
(계속)
2005.08.24 17:05:46
<남당ㆍ도당ㆍ명당ㆍ신궁, 그리고 나정(蘿井)>(끝)
왕망(王莽)에게 찬탈당한 한(漢) 왕실을 다시 세운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는 즉위고천(卽位告天) 의식을 당시 왕성인 낙양성 남쪽 교외 7리 지점에서 행했다고 하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명당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명당이 도대체 어떤 구조를 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광무제의 즉위고천 의식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後漢書) 광무제본기와 같은 제사지(祭祀志) 등지에 전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하고 있다. 즉,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 혹은 그 동의어인 8각 건물에 주변 혹은 바닥은 4방으로 건설했다는 뜻이 된다.
명당이 지닌 이런 건축학적 특성은 광무제에 의한 후한 왕실 개창 직전인 전한 말기에 완성된 '대대례'(大戴禮)라는 의례서에 명확히 보인다. 이에 의하면 "명당이란 곳은 옛날부터 있었으니 모두 실(室.방)이 9개이며, …띠풀로 지붕을 만들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가 났다"(以茅蓋屋,上圓下方)는 언급에서 단적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왕궁인 월성 정남쪽에 위치한 나정의 팔각건물이 고대 중국에서 말하는 명당(明堂)에 해당하는 신성 공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왕궁 기준 그 위치로 보아서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신라에 과연 명당(明堂)이 있었던가? 삼국사기 기록들을 일별하면 너무나 싱겁게도 그러한 결말은 내려진다.
먼저 첨해왕 3년(249)에 이르기를 이 해 가을에 "궁성(宮城) 남쪽에 남당(南堂)을 지었다"고 한 것을 필두로 첨해왕 5년(251)에는 왕이 처음으로 남당(南堂)에서 청정(聽政)했다고 했으며 미추왕 7년(268) 조에는 비가 오지 않으니 왕이 남당에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직접 정형(政刑)의 득실(得失)을 물었다고 했다.
나아가 눌지왕 7년(423)에는 왕이 남당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는 직접 그들에게 음식을 집어주었으며 곡식과 포백(布帛)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고 했으며, 진평왕 7년(585)에는 가뭄에 왕이 궁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한편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는 남당에 가서 직접 죄수(罪囚)를 다시 심사했다고 하고 있다.
이 남당은 그 설치 사실을 전하는 첨해왕 3년 조 기록에 의하건대 그 위치가 왕궁 남쪽이라 해서 이런 명칭으로 불렸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며, 아울러 그 별칭이 도당(都堂)이란 사실까지 덧붙이고 있다.
따라서 신라의 남당(南堂) 혹은 도당(都堂)은 왕궁 남쪽에 위치한다는 위치적 특성으로 보나, 그곳에서 왕이 집중적으로 각종 왕화(王化)를 베풀고 있다는 점에서 실은 그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명당(明堂)의 복사판이라는 사실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남당은 백제에도 있었음이 삼국사기에서 보이고 있다. 백제에도 남당이 있었고 신라에도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공통의 유래를 지니고 있음을 추측케 하는 동시에 그 뿌리가 고대 중국의 명당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정에서 확인된 4각 담장 갖춤 8각 건물은 명당이며 남당이요, 도당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과 신궁(神宮)의 관계가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소지왕 혹은 지증왕 때 시조(혁거세)가 탄강한 곳에 신궁(神宮)을 세웠다고 했다. 지금의 나정이 정말로 전설이 말하는 것처럼 혁거세가 탄강한 곳이라면 이 팔각건물은 신궁이 될 것이다.
팔각형건물터 심주 자리와 통일신라시대 기와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지금의 나정은 남당 혹은 도당 혹은 명당인 동시에 신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신궁이 명당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며, 이미 신궁이 들어서 있던 진평왕 7년(585)에 왕이 남당에서 직접 죄수(罪囚)를 재심하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신궁과 남당(명당)은 별도로 존재했음을 엿보이고 있다.
다만, 당 고종의 황후로서 남편 사후 직접 황제에 즉위하는 무측천의 경우 일대 제도 개편 와중에서 명당을 혁파해 신궁(神宮)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남당과 도당과 명당과 신궁, 그리고 현재의 나정과의 사이에 가로 놓인 이런 궁금증들은 추후 연구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됐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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