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윤주영...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다.
무령왕릉 발굴이 30주년을 맞은 2001년, 나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주무 장관이셨는데, 혹 당신이 무령왕릉 발굴을 지시하셨냐 라는 등등을 물었다고 기억한다.
예상대로 그는 이 발굴과 관련한 의미심장한 증언은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는 조선일보 무슨 고문인가로 있었다.
1928년생, 만 91세인 그는 요즘도 모임 같은 데 간혹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2. 김원룡...당시 국립박물관장이었다. 느닷없는 발굴책임자로 낙점되어 한국고고학, 아니 세계 고고학 사상 유례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하 생략
3. 안승주...무령왕릉 발굴 당시 당장 무령왕릉을 발굴해야 한다고 주창한 공주 지역 역사학계 주축 중 한 명이다.
나중인지, 당시인지 공주대 총장을 역임했다.
무령왕릉 발굴을 졸속으로 몰고가는 데 일조했다.
2001년 당시 이미 타계한 상태라 인터뷰는 불가능했다.
4. 박용진...안승주랑 마찬가지로 무령왕릉 출현 발굴 당시에 시종해서 현장에서 작업한 사람이다. 공주대인가 공주교대 교수였다. 그 역시 당장 발굴을 주장한 사람이다. 졸속 발굴에 대한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와 인터뷰가 이뤄졌다. 아마 내 책에 그 일부가 실렸다고 기억한다.
5. 김상기...한국 동양사학 태두이며, 무령왕릉 발굴 당시 이미 서울대를 퇴직했다. 당시 문화재위원장 아닌가 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홍직이었을 것이다.
근대 이래 역사학도 중 김상기는 한문 실력 최고다.
5. 이병도....한국사학 1세대로서, 고대사 태두로 꼽혔다. 무령왕릉 발굴에는 참여하진 않았지만, 이후 발굴보고서 작성에는 깊이 관여해서, 관련 논고를 제출했다.
6., 리선근...우리식 표기로 보면 이선근이나 본인은 리선근으로 고집했다. 무령왕릉 발굴과 그 보고서 작성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기억하거니와, 박정희시대 민족주체성이라는 시민종교의 절대적 확립자다. 그의 사관이 무령왕릉 보고서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7. 이은상...노산이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국학자요 시인이다. 그의 괄목할 만한 업적은 찬란하다. 나는 언제나 이은상을 동시대 중국의 곽말약에 비긴다. 그랬다. 그는 한국의 곽말약이었다. 리선근과 더불어 민족주체성 역사학 확립의 원훈대신이다.
그의 역사관이 무령왕릉에 깊이 각인한 것은 물론이다.
8. 박종홍...철학자다. 해방 이후 한국 철학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무령왕릉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수행한 역할은 리선근, 이은상과 동렬이다. 강렬한 민족주체성 주의자다.
9. 박상진....전남대를 거쳐 경북대 산림자원학과 교수였다. 지금은 은퇴했다.
그는 무령왕릉 관재가 일본열도 특산 금송임을 구명함으로써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무령왕릉 연구에서 가장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를 토대로 그는 산림자원학자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중화에 성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시중에 유통하는 각종 나무 이야기류 대중서는 모두 박상진을 선하先河로 삼는다.
10. 김태식...연합뉴스 기자...무령왕릉 레토릭의 새로운 세계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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