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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남대문 복원 5년 3개월은 기록적인 공사기간이었다

by taeshik.kim 2019.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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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8, 2013에 쓴 글이다. 


당시 남대문, 곧 숭례문 복원을 두고 말이 많았거니와, 단청 부실로 촉발한 광범위한 숭례문 복원을 둘러싼 사태에 참다참다 싸지른 글이다. 


현재도 참고할 만하다 해서 전재한다. 다만 '놈' 등이라고 쓴 대목은 '者' 등으로 바꾼다. 


5년3개월 걸려 수리복원한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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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이 불타고 오년삼개월만에 복원한 일을 두고 무리한 공기단축과 이에 따른 졸속복원이라는 말이 근거도 없이 횡행한다.

저들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데 저런 주장하는 그 어떤 者도 옛날엔 어떠했는지 설명하는 者가 단 한 者 없음이 기이하고 신이할 뿐이다. 

대규모 공사 실상이 어떠했는지 단 한 者라도 조사를 해보고 저 따위 소리해야 한다. 


경주 남산신성, 진평왕때 육개월만에 저 대따시 큰성 후다닥 쌓았다.

북한산성 남한산성도 일년이 채걸리지 않았고 한양도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대문 쌓는데 얼마 걸렸을거 같은가?

경복궁 창건과 중건 오년 넘은 줄 아는가?

순식간에 해치운다.


작금 고고학도들이 성벽 쌓는데 들어간 흙과 돌 총량이 얼마이니 이를 계산하면 연인원 몇만 동원해도 십년 이십년 걸린다는 말 새빨간 거짓말이다. 풍납토성 성벽 쌓기에 들어간 흙의 총량이 얼마이니 통전通典에 나오는 기록을 근거로 내세운 주장 새빨간 거짓말이다. 


북위北魏가 대동大同을 떠나 기습적으로 낙양으로 천도하여 궁성 왕궁을 세울 때도 순식간에 해치웠다. 


혹자는 옛날 공사는 실제 건축물을 쌓아 올리는 공기만 그렇다고 하나, 관련 기록 보면 목재 석재 채벌에서 건축에 이르는 공정으로 미리 대비한 것은 없고 모두가 순식간에 일련의 공정으로 일어난다.  


소나무를 베어 십년을 말려? 그래서 송진을 충분히 뺐다고?

증거대봐.


바로 베어 바로 다듬고 바로 올렸다.


숭례문


황룡사 목탑 십년 이십년 준비해서 쌓은 거 같은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법륭사法隆寺인지 어느 목탑도 일이년만에 벌채하고 순식간에 쌓아버렸다. 


유례없이 긴 공정을 소요한 건축물이 신라가 자비왕 때 지금의 충북 보은에 쌓은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쌓는데 3년이 걸렸다 해서 삼년산성이라 했다고 삼국사기 자비왕본기에 보인다. 


한데 왜 삼년산성이라 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성을 쌓는데 삼년이 걸리지 않아야 하는데, 비정상적으로 삼년이나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한 것이다. 


남대문이 설혹 졸속복원이라 하자. 그렇다 해서 공기가 짧아 그렇다는 헛소리는 말라. 오년몇개월은 단군 개국이래 가장 기나긴 목조건축 공정이다.


무식이 철철 넘치는 주장에 진절머리가 난다.


주석 


*** 본문에서 말한 일본 고대 사찰은 법륭사가 아니라 법흥사法興寺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법흥사法興寺는 숭준천황崇峻天皇 즉위 원년(588)에 기공된다. 한데 그것을 추동케 한 결정적인 동인은 다름 아니라 백제에서 불사리佛舍利가 전달된 일에 있었음은 이 일을 전하는 바로 그 《日本書紀》 卷21 崇峻天皇 元年 시세是歲 조에서 그 직전에 “百濟國이 견사遣使하는 한편 아울러 僧 혜총惠總과 영근令斤과 혜식惠寔 등을 보내어 불사리佛舍利를 헌獻했다”는 기록에서 명확히 뒷받침된다. 불교신학에서 (佛)舍利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한 지를 사리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법흥사法興寺라는 고대 일본의 거찰巨刹이 건립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생생하게 확인한다. 이어 《日本書紀》 崇峻 3년(590) 冬十月조에는 “산에 들어가 사찰에 쓸 재목을 구했다[入山取寺材]”는 기록이 보이므로, 이것이 2년 뒤인 崇峻 5년(592) 10월에 있은 대법흥사大法興寺 불당佛堂과 보랑步廊 기공을 위한 일환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찰 건축에 쓰일 목재를 겨울에 벌목한 것은 지금도 산림 벌채에는 예외가 아니며, 나아가 이후 2년 동안은 아마도 이렇게 벌목한 목재를 건조하는 등의 제반 준비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팡파르를 올린 법흥사는 추고推古 元年(593) 에는 마침내 “以佛舍利置于法興寺刹柱礎中”하게 된다. 이를 거쳐 法興寺는 推古 4년(596) 11월에 “造竟”을 보게 된다.


*** 상원(祥原) ○ 又以內醫院官員, 以都提調意啓曰, 我國之産出朱砂, 實出於意慮之外, 其爲珍異, 可謂莫大之幸。上年採取時, 未及窮探, 或慮砂脈之不長, 故凡節目之應爲變通者, 姑有所待矣, 今年監採官還來之後, 詳聞其形勢, 則撤毁人家, 鑿破砂穴, 則朱砂之露出者, 其數漸多, 前頭亦將有不乏之勢, 其看護及採取事, 不可不別樣變通矣。其中砂穴守直監考二人, 自上年以近處可合人擇定, 而其一人則精抄人, 一人則本道遠軍云, 其身役, 令該曹特爲頉下。採砂邊手四名, 初以黃海道鳳山居, 備邊司採鉛軍中, 習知砂脈, 善於採取者, 擇定矣。今則已有成效, 不但其功勞之可嘉, 將來採取之役, 專賴於此人等, 而一人則禁衛保, 三人則私賤云。私賤則依尙方工曹匠人例, 代給公賤, 軍保則頉下, 仍爲給復, 以爲激勸使役之地, 而採砂時所用役軍, 每以砂穴所在面民丁, 調用, 其弊不貲, 似當有特施慰悅之道。其面煙家雜役, 分揀勿定之意, 分付本道, 使之着實擧行, 何如? 傳曰, 允。(승정원일기 숙종 12년 9월 24일 (을사) 원본318책/탈초본16책 (16/20) 1686년 康熙(淸/聖祖) 25년) 그러나 숙종 32년 8월 20일 (을사) 고갈되어 채취 중단(이 승정원일기 관련 대목은 기호철 선생이 제시한 것이라, 숭례문 복원에 사용한 단청 소재가 일본수입산이라 문제라는 지적과 관련해서다. 조선시대에 단청 안료는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서 썼다. ) 


*** 호류지 대강당 수리공사보고서(동경대학 비공개 서고장서)에 보니, 공사 기간 3년반 정도! 엄청 큰 건물임에도! 

쇼와 10년 8월1일~쇼와 13년 11월! 


호류지 대강당 수리공사보고서(동경대학 비공개 서고장서) 표지

(이는 김란기 선생 제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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