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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기자? 기뤠기?

[내가 만난 사람들] 김선태 유적조사실장

<사람들> 김선태 문화재조사연구단장

김선태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장

30년 공무원 생활 접고 "새 출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문화재청이 관리ㆍ감독하는 특수법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산하에 매장문화재 조사를 전담하는 '문화재조사연구단'이란 조직이 있다. 조사단 직원만 70명 정도니 웬만한 중소기업 규모다. 


이 조사단 업무를 총괄하는 단장에 지난달 1일자로 김선태(金善泰.58) 씨가 임명됐다. 김 단장은 그 전날까지 꼬박 30년 동안 문화재청 공무원이었다. 


현재 그의 업무강도를 문화재청 공무원 시절과 비교할 수 없다. 1주일에 하루만 출근하는 '비상근 단장'이기 때문이다. 



고 김선태 실장. 한국의집에서 촬영했다.



다소 여유가 생겨서일까? 김 단장은 동국대 미술학부 동문전(展)으로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모란갤러리에서 개막한 '동국조각회' 올해 대회에 '무제'라는 나무 조각품 1점을 출품하기도 했다. 


"공무원 생활 30년 동안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 자신도 제 전공을 잃었다시피 했지만, 2000년 무렵 이후에는 조각에 손이 가더라고요. 뿌리는 속이기 어려운가 봅니다. 실기 조각 중에서도 테라코타를 주로 하는 편입니다." 


그는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으로 같은 날 명예퇴직한 신창수(57) 씨와 1984년 임용된 학예사 동기이기도 하다. 학예사 임용은 이때지만 그가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에 '일용직' 신분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78년이다. 


어떻든 공교롭게도 국립문화재연구소 내 최고참 학예직인 두 사람이 동시에 물러난 것이다. 


정년퇴직을 앞둔 명예퇴직자들이 으레 내세우는 퇴임의 변인 "후진들을 위해"라는 말이 김 단장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이젠 물러날 때가 되었죠. 문화재연구소 생활 30년에 후회는 없습니다. 저에겐 소중한 직장이었죠." 


하지만 정년퇴직을 2년 남겨두고 '조기강판'할 수밖에 없게 된 다른 곡절도 있다. 


1년여 만인 지난 2일 만난 기자에게 대뜸 그는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됐다"는 말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생명을 담보할 수 없었다. 


"지난해 7월 중순쯤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계속 기침이 멈추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직장 근처 대전 병원에 갔죠. X-레이를 찍었는데 결핵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계속 기침이 나요. 그래서 병원 두 군데를 더 갔더니 한 곳에선 감기라고 하고 다른 데선 결핵이라 합니다. 한데 찜찜해요. 그래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와서 정밀진찰을 받았습니다. 폐암이라더군요. 청천벽력이었죠. 폐암 3기 초반이래요.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지금쯤 이승에 없을 것입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수술은 잘됐다. 폐를 5분의 1 정도 잘라내고, 치료를 계속한 결과 지금은 암세포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요양을 위해서도 조기퇴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과 같은 아찔한 순간이 김 단장에겐 두 번이 더 있었다. 


"1998년인가 1999년인가 정재훈 당시 문화재관리국장 퇴임식이 서울 시내 모처에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눈이 갑자기 이상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각막이 튀어나왔다는 거예요. 의사가 그러더군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을 거라고. 2000년에는 눈길에 미끄러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단순한 골절이 아니라, 처음엔 의사가 의족을 만들어 넣자고 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가까스로 의족 신세는 면했습니다." 


이 다리 부상으로 김 단장은 지금도 걸음걸이가 불편하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69년 공주고를 졸업한 그는 1976년 2월에는 동국대 미술학과를 마치고 1978년 황수영, 문명대 교수의 추천으로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96년에는 창원문화재연구소장, 1998년에는 유적조사실장. 2004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장을 역임하고 2005년 이후 퇴직 때까지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으로 재직했으니, 학예직으로 웬만한 자리는 다 거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연구소 생활에 여한이 없다"는 말은 이에서 비롯된다. 


이런 그에게 연구소 생활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1978년 이후 1983년까지 참여한 신안 해저유물 발굴조사를 들었다. 


"당시 이 발굴조사 도면과 야장(발굴일지)을 제가 썼습니다. 이런 자료들은 지금 문화재청에 다 있습니다. 당시 조사자료를 제가 다시 정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하지만, 그럴 여력이 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taeshik@yna.co.kr

(끝)  



고 김선태 실장. 한국의집에서 촬영했다.



기사 작성일이 2008년 10월 6일이라, 그러고 보니 근황이 어떤지 궁금했으니, 어째 느낌이 좋지는 않아 그의 오랜 직장 동료인 신창수 백두문화재연구원 대표이사께 전화로 확인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2년전쯤 돌아가셨잖아" 하는 것이었다. 


혹 우리 공장에서 부고 소식을 전했던가 해서 검색하니 아니 걸린다. 할 수 없이 문화재청 대변인실로 기별을 넣어 아마 내부통신망에 부고 소식이 떴을 법한테 찾아달라 부탁했더니 이내 연락이 오기를 2018년 4월 12일 타계했다는 소식이 있단다. 


나 역시 요새는 기억이 하도 오락가락이라, 그의 타계 사실을 통보받았는지, 받고 무얼 했는지 아닌지 아리까리 도통 떠오르지 아니한다. 


김선태...한국문화재사에서 화려한 족적을 남겼다 하기는 힘들지만, 저 이력에서 보듯이 1978년 이래 각종 국가주도 문화재 현장에 그 흔적으로 오롯이 새겼다. 특히 신안해저유물 발굴조사에 그는 헌신했다. 


그는 참 조용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조우하기는 지금의 경북궁 고궁박물관 근처에 있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대전으로 이사하기 전이었으니, 그 마지막 시절 유적조사실장(당시 정확한 명칭인가는 자신이 없다)었다고 기억한다. 연구관에 윤근일 선생이었고, 한창 현장에서 활동하는 학예연구사로는 신희권이 있을 무렵이었다. 연구소장은 조유전 선생이었다. 


그 무렵은 내가 그 연구소 자료실을 뻔질나게 들락거릴 때이며, 덧붙여 이런저런 이유로 유적조사실을 사랑방 삼기도 했으니, 아마 풍납토성 발굴이 한창이었던 그런 인연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층인지 혹은 다른 층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박상국 선생은 미술공예실장으로 해외 전적문화재 조사와 불교서지학 조사에 주력하던 무렵이었다. 


나한테 각인한 김선태 선생은 시종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때로는 너무 주변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로대, 그렇다 해서 그가 아랫사람을 부러 괴롭히거나 하는 그런 스타일은 전연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물론 이는 당시 기자로서 피상으로써만 지켜본 까닭에 혹 다른 이야기를 할 사람도 많을 줄로 안다. 


문득 오늘 다른 일로 공장 DB를 검색하다가 그의 인터뷰 기사가 걸려 새삼 긁어와 상념에 빠져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인터뷰를 왜 했던가를 설핏 기억력을 떠올려 보니, 그의 건강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본문에서 언급되었듯이 그는 사선을 넘었다가 돌아왔다. 그 소식을 접하고는 자칫 이러다가 또 하나의 한국문화재도서관이 영영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촉급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훗날 혹 잘못될 날을 대비해 인터뷰 하나 해 두자 해서 저 취재를 했다고 기억한다. 중구 필동 한국의집에서 만났다. 뒤늦게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