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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기자? 기뤠기?

문화재청의 산증인 윤홍로

윤홍로 선생

 

윤홍로 선생을 장장 세 시간 인터뷰했다. 그간 사석에서 들은 얘기들도 있고 새로운 내용도 있다. 


1939년 12월3일(음력) 전남 무안 하의도 출생이다. DJ 오른팔 한화갑과는 목포고 동기다. 하의도 섬마을 출신이라고 나랑 비슷한 과라 생각했더니 고산 윤선도가 이룩한 터전에서 이룩한 염전 밭 주인 금수저 출신이시구나.


"1959년 홍익대 건축학과 합격했어요. 그땐 연세대엔 건축학과도 없을 때야"


하필 왜 연세대 얘기를?????

윤홍로 선생


제대후 복학한 이후인 1966년 홍익대 건축학과 4학년 재학시절 알바로 문화재관리국 영선계에 발을 디딘 이래 반세기 동안 문화재와 연을 쌓은 문화재계 산증인 중 한 분이다. 북한산 순수비 이송 장면을 담은 사진도 새로 얻었다. 


관련 인터뷰 중 일부는 문화재청 월간 《문화재사랑》 2017년 2월호에 실릴 것이다. (January 10, 2017) 

 

한국 문화재 보수·정비의 역사에서 윤홍로라는 이름이 빠질 수 없다. 관리국 입사 직후인 1968년 아산현충사성역화사업 현장 감독관으로 파견된 이래 70년대 들어서는 행주산성과 진주성, 오죽헌, 파주 자운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세종대왕 유적 정비에 투신했다. 80년대에는 궁궐이나 행궁, 그리고 사원 유적 정비 복원에 혼신의 힘을 쏟았으니, 우리가 아는 문화재 현장은 거의 다 그의 손때가 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그에게 1979~80년, 6개월간의 일본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 연수생활은 또 다른 인생 전기를 마련한다.


“저는 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문화재연구소에도 있었어요. 저때는 관리국에 있을 때인데, (연구소장인) 창산 김정기 박사가 느닷없이 저를 추천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창산께 여쭈었어요. ‘아니, 소장님은 왜 저를 뽑으셨어요?’. 그랬더니 딴 말씀 안 하시고는 ‘잔소리 말고 갔다 와’ 하시더라구요.” (January 1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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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 원고는 예고대로 그 다음달에 실렸다. 그의 이력을 정리한 내 기사 몇 건이 있는데 개중 하나를 전재한다. 

 

2007년 윤홍로 선생

 

2007.12.09 10:04:01 
<인터뷰> 한국 고건축의 전설 윤홍로 
41년 외골수로 현장 지켜..보관문화훈장 수상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그의 주변엔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가 비춘 적이 없다.  

1971년 여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을 때도 그 발견을 이끌어낸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건축 전문가 윤홍로(尹洪璐)씨. 40여년을 헤아리는 그의 문화유산 인생은 늘 이랬다고 할 수 있다. 홍익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기 전인 1966년, 대학 재학생 신분으로 그는 문화재관리국(이후 문화재청으로 승격) 국립종합박물관 건립 설계에 참여했다. 이것이 문화유산과의 질긴 운명적 만남의 순간이었다.  

"당시 정인국 교수님께 배웠는데 어느날 문화재관리국에 가서 일하라 하시더군요. 요즘으로 보면 아르바이트였던 셈인데, 그렇게 일하다가 장경호 선생님(나중에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역임)이 저보고 '야 여기 눌러앉아서 함께 일해 보자' 하시더군요. 그래서 1967년 졸업을 하면서 문화재관리국에 촉탁 건축수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문화유산 현장에 첫 투입된 국립종합박물관 건립계획 설계란 현재의 경복궁 안 국립민속박물관 건물 설계를 말한다. 이 박물관은 국보건설단 문화재설계사무소가 설계한 것으로 국보로 지정된 법주사 팔상전과 화엄사 각황전, 그리고 금산사 미륵전을 모델로 실시설계되었으나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해 이를 보완하는 작업을 거들게 된 것이다.  

"국립박물관이 있는데 왜 문화재관리국이 국립박물관 건립계획을 세우게 되었느냐 하면, 물론 박정희 대통령 지시도 있었고, 무엇보다 박물관에는 정책 수립 기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문화유산 고건축 현장의 '살아있는 전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주인공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는 '고건축 현장 전문가 윤홍로'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런 점에서 1966년 이후 한국 고건축 문화유산은 윤흥로가 관여한 문화유산과 그렇지 않은 문화유산으로 대별할 수가 있다. 하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고건축물을 찾아내기란 심히 어렵다. 그만큼 한국고건축 문화유산 대부분에는 그의 땀이 묻어있다.  

 

2007년 윤홍로 선생



칠순을 앞둔 그는 요즘도 전국을 누빈다. 고건축 현장에 문제만 생기면 문화재청에서 그에게 일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아직도 내가 직원으로 보이나 봐요"라고 웃어넘기면서도 "이게 제 천직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고건축 문화유산 인생 역정은 그야말로 다채롭다. 1969년 건축기사보로 승진한 그는 아산 현충사 성역화 사업의 공사감독으로서 장경호 박사를 보좌했으며, 70년 이후 73년까지는 건축기사로서 안동 도산서원과 행주산성, 진주성 성역화 사업 공사감독으로 일했다. 또 경주 불국사 복원 중창공사 설계검토와 발주에 따른 업무를 총괄했다. 이 무렵에 바로 그 유명한 무령왕릉 발굴이 이뤄진다.   

"1971년 7월5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건설과정에서 전돌(벽돌)이 출현했다는 급보를 받았을 때 저는 부여에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충남 지역 문화재 보수 정비공사 책임을 맡아 부여 무량사 극락전과 궁남지, 부소산성, 공주 공산성 등의 보수 정비를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현장에 출동해 보니, 배수로에 전돌이 출현해 있는 겁니다. 무덤이라고 직감을 했지요. 즉각 현장 보존조치를 지시하고 문화재관리국장에게 보고함으로써 발굴이 이뤄져 무령왕릉 무덤임이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무령왕릉 발굴을 지휘한 김원룡 박사는 회고록에는 김영배 당시 국립공주박물관장과 함께 무덤에 먼저 들어갔다가 무덤 널길에 놓여 있던 지석(誌石)에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란 문구를 읽어내고 무령왕릉임을 연표를 통해 확인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연표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 바로 윤흥로였다. 

이 '동양연표'를 그는 지금도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다. 한데 이 동양연표 중 무령왕이 사망한 523년과 그가 송산리 고분군에 묻힌 525년 칸에는 노란 색칠이 돼 있다. 그가 얼마나 무령왕릉 발견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이후 78년까지는 문화재관리국 건축사무관으로 여주 세종대왕릉 정화사업,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경회루 보수공사, 국립진주박물관 건립공사, 진주성 보수 정비 등을 총괄하는 한편 문화재 수리 표준 품셈 및 시방서 편집을 총괄했다.  

"당시만 해도 문화재 보수 수리 비용에 일정한 원칙이 있었겠어요? 예컨대 목수들과 함께 일하면서 거기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처음으로 표준품셈이란 것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79-80년에는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연수를 했으며 귀국해서는 암사동 선사유적지 복원정비를 총괄했다. 83년 이후 86년까지는 문화재관리국 보수과장으로 있으면서 88서울올림픽에 대비해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과 몽촌토성, 서울성곽과 북한산성, 남한산성 보수를 총괄했다.  

평생을 문화재관리국에서 보낼 줄 알았던 그도 '외도'가 있었다. 1986년 8월4일, 완공을 앞둔 독립기념관에 화재가 나 온나라가 시끄럽게 되자, 그 복구공사를 위해 그가 독립기념관 건설국장으로 징발된 것이다.  

"이쪽에선 가라 하고 저쪽에선 오라 하는 데 어쩔 수가 있나요? 500억원 국민성금사업으로 시작한 독립기념관에 화재가 난 대참사를 1987년 8월에 수습하고 나니, 그곳에서 제가 할 일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사직서를 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6개월만에 사표가 수리되고 1989년에 문화재관리국 상근문화재전문위원이라는 직함으로 복귀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상근문화재전문위원 생활은 2003년까지 계속된다. 

"처음엔 (상근문화재전문위원이) 대우가 괜찮을 줄로 알았습니다. 한데 제가 보수과장으로 일할 때보다 월급이 적더군요."  

박봉과 '치닥거리', 그리고 '그림자'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서도 두 번의 '돈 폭탄'이 있었다. 한 번은 2003년 문화재청 퇴직 때 받은 공무원 연금이며, 다른 한 번이 바로 2007년 문화유산상 '문화훈장'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 1천만원이 그것이다. 아마도 그에 대한 훈장 수여는 41년을 헤아리는 그의 고건축 문화유산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순간일 것이다. 2005년에는 문화재위원회 건축문화재분과와 문화재경관분과 문화재위원으로 선임됐다. 노년에 빛을 보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도 지나온 길에 후회는 없으시죠"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보다 기술기능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 요즘 문화재 보수현장에서 일하는 목수는 정부단가로 일당 8만원입니다. 두 배 이상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산과 시간에 쫓겨 문화재 보수수리를 너무 서둘렀습니다. 문화유산만 생각했지 그 주변 경관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이 경관 문제를 좀 더 일찍 깨우쳤더라면 종묘 주변이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귀감으로 삼는 두 사람의 일화를 들었다.  

"일본 나라의 고대 궁성인 평성궁(平城宮)은 1950년대만 해도 허허벌판 폐허였습니다. 이를 보존하고 정비해야 한다고 한 시민이 나섰습니다. 이런 호소가 먹혀 일본 정부에서 나서 손을 댔다가 중단해 버립니다. 그러자 이 시민은 자살했습니다. 자살하면서 평성궁을 보존해야 한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평성궁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일본 호류지(法隆寺)에는 3대째 대목장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가업을 이은 이 분은 1908년생, 니시오 가쓰네라는 분인데 지금도 이곳에서 대목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집을 지으려거든 나무를 사지 말고 산을 사라.' 그의 장인 정신이 부럽습니다."  

그가 요즘 각종 외부 강연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누에는 뽕잎에서 비단실을 자아낸다."  

송충이가 뽕잎을, 누에가 솔잎을 먹었다가는 죽고 만다. 문화재 보수수리 정비도 한 분야를 평생을 두고 파고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taeshik@yna.co.kr 
(끝)